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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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로마의 납

저출산으로 고민하는 사회는 대한민국만이 아니다. 고대 로마도 고민했다. 주류 학계는 로마의 저출산 현상은 기원전 50년부터 300년 이상 꾸준히 심화한 것으로 본다. 이유는 뭐였을까. 가장 논쟁적인 답변이 여성 지위 상승이라면 가장 기발한 답변은 ‘납 중독’ 가설일 것이다.

납 중독 가설은 학계에선 기각된 가설이다. 그럼에도 제법 그럴싸하게 퍼져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유로도 꼽힌다. 로마의 상수도관이 납관으로 돼 있어 납 중독을 사회화했다는 것이다. 포도주 제조과정에서 거대한 납 용기를 쓰거나 단맛을 내기 위해 납 가루를 첨가하는 바람에 탈이 났다는 ‘포도주 납 중독’ 가설도 있다.

저출산 원인설, 제국 멸망설 등은 과학적 근거가 없지만 로마가 납 중독에 노출돼 있었다는 것만은 과학적 근거가 탄탄하다. 오스트리아의 독성학자 호프만의 1883년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유는 뭐였을까. 로마에 납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은 광산의 채굴 과정에서 대규모의 납을 부산물로 얻었고 그것으로 수도관, 화장품, 약, 화폐, 도료, 책상 등을 만들었다. 특히 부작용을 키운 것은 식기, 조리기구였다고 한다.

그린란드 빙하핵(Ice Core) 속의 납 성분을 분석해 로마를 들여다보는 이색 연구가 성과를 내 세계 고고학계가 들썩인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최근 보도가 이렇다. 미국 네바다주 사막연구소 연구팀이 납의 양을 1조분의 1g까지 분석했더니 로마 경제의 부침과 일치하는 변동선이 그려졌다는 것이다. 빙하핵의 납이 로마 문명 이야기를 들려주는 타임캡슐로 둔갑한 셈이다.

과학적 성과는 이래서 흥미롭다. 납은 그동안 로마를 위협한 독소로 인식되기 일쑤였다. 빙하핵 연구는 그런 인식과는 전혀 다른 측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번에 나온 변동선을 보면 로마 경제 번영기에는 납 배출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쇠퇴기에는 감소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로마의 납은 풍요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납은 선인가 악인가. 새롭게 드러난 사실관계를 토대로 이렇게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은 로마의 납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옆에 허다하게 있을지도 모른다. 저출산 문제부터 그럴 테고….

이승현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