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설왕설래] 태영호와 재증걸루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475년의 글. “고구려 대로인 제우와 재증걸루, 고이만년이 북성(北城)을 쳐 7일 만에 함락했다. 남성(南城)을 치니 성중은 흉흉했다.” 글은 이어진다. “왕이 도망해 성을 빠져나갔다. 걸루가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한 후 얼굴에 세 번 침을 뱉었다. 죄를 책망하고, 아단성으로 데려가 살해했다.”

백제를 공격한 장수왕의 3만 군사. 북성은 북한산성, 남성은 위례성으로 보인다. 아단성은 서울 아차산성이다. 개로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공격에 앞장선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누구일까.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 장수다. 침을 뱉고 죄를 따졌으니, 개로왕을 증오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즈음 백제로 간 고구려 승려 도림. 바둑의 고수로, 간첩이다. 바둑에 빠진 개로왕을 구워삶은 도림은 이런 말을 했다. “높은 위세와 큰 업적을 보여 줘야 할 텐데… 성곽과 궁실은 낡고, 선왕의 해골은 빈 들판에 묻혀 있사옵니다.” 그 말을 믿은 개로왕은 화려한 궁실과 누각을 지었다. 이어지는 삼국사기의 글, “창름은 비고 인민은 곤궁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 망명한 때는 그즈음이다. 배신? 우스운 소리다.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것인가.

16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판박이 역사가 눈앞에 벌어진다. 북한이 “인간쓰레기”라고 한 태영호 전 북한공사. ‘3층 서기실의 암호’에 쓴 글, “단언컨대 북한은 현대판 노예사회다.” 자유를 잃고, 가난에 찌든 참상을 이르는 말이다. 주체사상 설계자인 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김정일은 사람을 죽이고, 영혼까지 빼앗는다.”

태 전 공사가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위원직을 그만뒀다. “자발적인 사의 표명”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을 “북송하라”는 소리가 난무한다. 인권? 어디서 찾아야 하나. 사퇴 이유가 아리송하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내 발로 평양에 가고 싶다. 친구와 친척, 나의 혈육…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나만 대한민국에 와 있는 현실이 한스러워.” 북한 해방을 바라는 태 전 공사의 애타는 말이다.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