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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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개헌 끝내 불발… 여야 대국민 약속은 지켜야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헌법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표결이 어제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무산됐다. 야 4당의 보이콧으로 의결정족수인 재적의원(288명) 3분의 2(192명)에 미치지 못하는 114명만이 투표에 참여해 표결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이로써 지난 3월26일 문 대통령이 발의한 정부 개헌안은 59일 만에 폐기됐다. 대통령 개헌안이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처리되지 못한 건 헌정 사상 처음이다. 청와대는 “표결 불참은 직무유기”라고 야당을 비난했다.

개헌안 처리 불발은 예견된 일이었다. 야 3당이 청와대에 철회를 요구한 만큼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했다. 그런데도 무리하게 밀어붙인 청와대에 책임이 있다.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대선 때 ‘지방선거 동시 개헌 투표’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야당에 대한 설득 노력 없이 일방적 개헌안을 발의한 건 독선이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야당 대선 후보들은 지난해 대선에서 6월 지방선거 동시개헌을 약속했다. 그러고도 여당과의 논의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권력구조 개편 등을 둘러싸고 정쟁만 벌이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사사건건 개헌 추진을 가로막고 국민투표법 개정에도 정략적으로 접근했다. 한국당은 대통령과 여당이 개헌안을 내놔야 논의가 가능하다고 하고선 막상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자 “국회를 무시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이번 개헌 논의는 이른바 1987년 민주화 바람을 타고 탄생한 현행 헌법이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초래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전직 대통령들의 잇단 수난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부작용은 이미 입증됐다. 제도의 단점을 보완하고 헌법을 한 차원 높게 손질한다는 차원에서 국민 공감대도 어느 때보다 높다.

정부발 개헌은 무산됐지만 정치권의 대국민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민 과반이 개헌에 찬성하고 있는 만큼 그 동력을 살려나가야 한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어제 “개헌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가 여전히 새 헌법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야는 개헌 무산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정치 공방을 중단하고 대승적 자세로 개헌에 임해야 한다. 우선 다음달 말 끝나는 헌법개정·정치개혁특별위원회 활동 시한을 연장할 필요가 있다. 국민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