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사설] 북·미 정상회담 취소… 北 비핵화에 진지하게 응해야

핵실험장 폐기 ‘제2 영변 쇼’ 우려 / 생트집·막말공세 거둬들여야 / 평화정착 기회 걷어차지 말길
북한이 어제 남한과 미국·영국·중국·러시아 등 5개국 취재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행사를 가졌다. 핵실험장 폐기는 폭약을 이용해 모든 갱도를 무너뜨리고 입구를 막은 뒤 지상시설을 철거하고 핵실험장 주변을 폐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북한은 국제사회에 천명한 비핵화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우리 정부는 “비핵화와 관련된 첫 번째 조치”라며 “추후에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폐기 현장엔 외부 전문가가 한 명도 참가하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문가를 초청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북한 세관은 방북 취재진에 대해 대기 중 방사성 물질을 측정하는 선량계의 반입을 불허했다. 보여주는 것만 취재하라는 뜻이다. 핵개발 증거 인멸용 쇼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의 전례를 뒤따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북한은 10년 전 폭파 쇼를 벌이고 몰래 핵개발을 계속했다. 이번에도 핵실험장 폐기 쇼로 대북제재를 피하려 해선 곤란하다.

북한이 연일 쏟아내는 막말 공세로 미뤄볼 때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어제 담화에서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 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나는 조미수뇌회담(북·미 정상회담)을 재고려할 데 대한 문제를 최고 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북한이 리비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의 경고를 트집 잡은 것이다. 중국의 뒷배를 믿고 미국과의 핵 담판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술수다. 미국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우리는 비핵화 절차 또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적절한 시기에 북한의 정당한 안보 우려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고 북한을 두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달 12일 열릴 예정이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했다. 공개 서한에서 “당신들의 최근 발언에 나타난 엄청난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에 기반해, 지금 시점에서 오랫동안 계획돼온 이 회담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다만 “언젠가는 당신을 만나기를 고대한다. 마음을 바꾸게 된다면 전화하거나 편지해달라”고 했다. 북·미 관계 해빙무드에 급제동이 걸렸지만 기회의 창이 아주 닫힌 것은 아니다. 북한은 생트집을 중단하고 비핵화에 진지하게 응해야 한다. 4·27 판문점선언에서 다짐한 한반도 평화 정착의 기회를 걷어차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