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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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국민 염원 담은 서체로 역사 현장 기록 … 큰 영광”

남북정상회담 기념식수 표지석 글씨 쓴 여태명 교수 / 서민 체취 물씬 풍기는 ‘민체’로 / ‘평화와 번영을 심다’ 문구 새겨 / 남북 평화 작게나마 일조… 뿌듯 / 전주한지에 쓴 원본 가보 삼을 것 / 평생 서체 연구하며 폰트 등 선봬 / 서예학 명맥 유지에 온힘 쏟을 것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글씨입니다.”

원광대 서예문화예술학과 여태명(62) 교수는 지난달 27일 이뤄진 남북정상회담 장면만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기념식수를 한 뒤 표지석의 하얀 가림막을 걷는 순간 그가 쓴 ‘평화와 번영을 심다’라는 검은 글귀가 세상 밖으로 환하게 드러났다. 여 교수는 25일 “평생 연구해 온 서체가 역사적인 현장을 생생히 기록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며 “남북이 평화의 길을 여는 데 미력하나마 일조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영광”이라고 말했다.  

여태명 원광대 교수가 25일 연구실에서 자신이 쓴 남북정상회담 기념식수 표지석 글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주=김동욱 기자
여 교수는 남북정상회담을 1주일여 앞두고 청와대로부터 기념식수 표지석 글씨를 써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훈민정음체(궁서체)와 조선시대 전주지방에서 출판된 가장 일반적인 글씨체인 완판본체(完板本體), 그가 평생 연구해 개발한 민체(民體) 등 세 가지 글씨를 써 청와대에 보냈는데, 이중 민체가 최종 선택됐다. 여 교수는 “민체는 말 그대로 백성의 글씨”라고 설명했다. 궁중에서 쓰는 서체인 훈민정음체와 달리 민체는 여 교수 스스로 ‘개똥이체’라 부를 정도로 서민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그가 쓴 글씨는 파주에서 난 화강암 표지석(1.4×0.9m)에 아로새겨졌다. 표지석 본문과 두 정상 이름은 민체로, ‘대한민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직책, 날짜는 훈민정음체로 썼다. 각각의 글씨가 조화를 이뤄 화합과 평화,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았다는 설명이다. 여 교수는 “전주한지에 쓴 표지석 원본을 표구해 가보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 교수는 남북정상회담을 1주일여 앞두고 청와대로부터 기념식수 표지석 글씨를 써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훈민정음체와 조선시대 전주지방에서 출판된 가장 일반적인 글씨체인 완판본체(完板本體), 그가 평생 연구해 개발한 민체(民體) 등 세 가지 글씨를 써 청와대에 보냈는데, 이중 민체가 최종 선택됐다. 여 교수는 “민체는 말 그대로 백성의 글씨”라고 설명했다. 궁중에서 쓰는 서체인 궁서체와 달리 민체는 여 교수 스스로 ‘개똥이체’라 부를 정도로 서민의 체취를 물씬 풍긴다.

그가 쓴 글씨는 파주에서 난 화강암 표지석(1.4×0.9m)에 아로새겨졌다. 표지석 본문과 두 정상 이름은 민체로, ‘대한민국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직책, 날짜는 훈민정음체로 썼다. 각각의 글씨가 조화를 이뤄 화합과 평화,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국민의 염원을 담았다는 설명이다. 여 교수는 “전주한지에 쓴 표지석 원본을 표구해 가보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 교수는 1998년 △효봉 축제체 △효봉 푸른솔체 △효봉 개똥이체 등 한글폰트 6종을 발표하고 지식재산권에 등록했다. 서체에 붙은 ‘효봉’은 그의 호다. 문화체육관광부 현판과 KBS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1박2일’ 타이틀 등이 모두 그의 민체다.

그는 한글을 쓸 때마다 자획 하나하나에 뜻을 부여하고 형상을 입힌다. 호남고속도로 전주톨게이트에 내걸린 ‘전주’가 대표적이다. 여 교수는 “자식이 전주에 들어올 때는 어머니 모습이 먼저 떠올려지기에 모음(母音)인 ‘ㅓ’와 ‘ㅜ’를 크게 부각시켰고, 반대로 자식이 객지로 떠날 때는 금의환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음(子音)인 ‘ㅈ’을 상대적으로 크게 썼다”고 설명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습자부 선생님으로부터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받으며 서예에 흥미를 갖게 됐다. 이 지역에서 처음 열린 미술 실기대회에 서예부로 출전해 개교 이래 처음으로 1등을 차지했을 땐 집안에서 돼지를 잡을 정도로 큰 경사였다. 대학 진학 때는 서예과가 없어 동양학과(한국화과)에서 서예를 연마했고, 군 제대 뒤에는 서예학원을 운영했다. 1989년 원광대에 교양과목으로 서예학과가 생기자 시간강사로 출강하다 1995년 교수로 임용돼 23년째 한글서예와 전각을 가르치고 있다. 여 교수는 “한때 여름방학이면 전주 한옥마을 한복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관광객과 시민들에게 인장을 파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서예가로서 명성이 자자한 그가 체면을 무릅쓰고 이 같은 일을 자청한 것은 학생 수 감소로 서예학과가 폐과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서예학은 광범위하고 어려운 분야인 데다 서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사라져 한때 40명이었던 학과생은 올해 복학생 단 2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여 교수는 “앞으로 후배나 제자들이 한글서체를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민체 자전(독법·의미 등을 해설한 책)을 만들고 싶다”며 “기호, 부호 등을 포함한 해체식 문자체계를 연구해 작품화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전주=김동욱 기자 kdw7636@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