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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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천사는 ‘마음’에 살고 있다

10시간 뇌종양 수술 받은 친구 / 천사들 보살핌 받았다며 웃어 /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 신생아 털모자 뜨기로도 가능
얼마 전 친구가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멜론 크기 정도의 뇌 속에 5cm 크기 가량의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뇌수술이라는 게 엄청난 일이기에 크기가 커도 양성종양이니 추적검사를 통해 추이를 지켜보자는 의사도 있었지만 친구는 제거수술을 하는 쪽을 선택했다. 10시간이 넘는 큰 수술이었지만 다행히 종양은 깨끗이 제거됐고 회복 중이다.

안현미 시인
어제는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에 다녀간 친구, 친지들의 사진 여러 장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고 자신의 근황을 이렇게 알렸다. “근 열흘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수술실에서, 회복실에서, 중환자실에서, 그리고 일반 병동에서 나는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천사들은 병원 밖에서 찾아와 한참 놀다 가기도 했다”고. 수술 결과가 좋아서 그렇지 친구와 친구의 가족이 감당해야 했던 지옥 같았을 시간을 상상하면 어머니를 뇌출혈로 잃은 나로서는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수술이 잘돼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 친구의 5cm 종양 때문에 생각난 것이지만 취직을 하기 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공들여 쓰고 면접을 보러 갔던 열아홉 살 때 5cm만 키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종합무역상사라 신용장(L·C) 개설 등 은행에 가야 하는 업무가 많은 그 회사는 여직원의 용모와 키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면접을 보러 가면 벽에 160cm 높이에 가로로 줄이 그어져 있고, 세 명씩 면접 보러 들어가 나란히 섰을 때 그 줄보다 키가 작으면 무조건 떨어뜨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고졸 취준생으로 어떻게든 취직을 해 어머니의 무거운 짐을 덜어드리고 싶었던 나로서는 그때 5cm가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소문은 소문일 뿐 그 회사는 나의 첫 직장이 됐다. 그러나 취직 후 배치받은 팀의 팀장이 키가 160cm가 안 되는데 입사한 걸 보면 대단한 ‘빽’이 있는 거 아니냐는 농담을 한 걸로 봐서 그때는 몰랐지만 그 벽 앞에 섰을 때 내게도 천사가 와주었던 건 아닐까?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의 ‘신생아 살리기 모자뜨기 캠페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자발적인 참여는 아니었지만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아프리카의 신생아를 살리기 위해 작은 털모자를 뜨면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소소하고 서툴더라도 작은 털모자 하나로도 가능하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었다.

그러고 보면 무디고 무신경해서 몰랐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슈바이처나 마더 테레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곁에는 의외로 천사 같은 사람이 많고, 그 천사 같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질병에서, 가난에서, 슬픔에서, 그리고 절망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뇌종양 수술을 받은 내 친구가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느끼고 살아났듯이.

어떤 시인이 말했다. “천사가 있다면 정신 안에 살고 있으리라. 어렸을 때 우리 집에 얹혀살던 바보 고모는 언제나 왼쪽 신을 오른발에, 오른쪽 신을 왼발에 신고 다녔다. 종생토록 그 버릇을 고쳐줄 수 없었다. 천사는 그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어린 나를 업고 다녔다.” 그렇다. 왼쪽 신을 오른발에, 오른쪽 신을 왼발에 신고 다니는 바보일지언정 비척거리는 걸음을 걸으면서도 어린 목숨을 업고 다닌 그 마음, 어떻게든 취직을 해서 가난한 어머니의 무거운 짐을 덜어드리고 싶어 까치발을 디디고 섰던 그 간절함, 큰 수술을 앞둔 친구의 두려움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달려온 그 발걸음. 천사는 그런 것들 속에 깃들인 어떤 정신 안에 살고 있는 게 아닐지.

흔히 부모가 돼 자식이 태어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말하고는 한다. “우리 천사 좀 봐. 지금 날 보고 방긋 웃었어.” 우리는 언젠가 다 천사였던 때가 있다.

안현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