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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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커뮤니케이션 참사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9월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을 만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대한 조속한 조사 완료를 요청했다. 미국은 BDA에 예치된 김정일의 비자금 2500만달러를 동결했는데 북한은 6자회담 복귀 조건으로 해제를 요구하던 상황이었다. 언론의 확인 요청에 성 김 미 국무부 과장은 “그럴 계획이 없다”고 했다. 대통령이 체면을 구기게 되자 청와대 참모들이 나섰다. 송민순 통일외교안보실장과 윤태영 대변인은 조기 종결 요청을 부인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TV토론에 나가 요청 사실을 인정했다. “그런 조사가 빨리 마쳐졌으면 하는 희망이죠. (중략) 우리나라 수사는 빠르잖아요. 농담을 했죠. 우리나라 검찰에 맡기면 금방 해줄 텐데.” 진지해야 했던 외교커뮤니케이션에 오작동이 발생한 것이다.

생각이 다르면 한자리에서 했던 이야기도 다르게 들리는 법이다. 송 실장은 당시 방미 때 북핵 해결과 6자회담 재개를 위해 한·미 정상 간에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을 만들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노 대통령도 그렇게 말했는데 미국 언론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빅터 차 백악관 보좌관은 청와대 발표에 대해 “정상회담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기자회견을 하면서 중국의 북·미회담 훼방에 대해 불쾌한 심경을 노출했다. 그는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과 두 번째 만난 뒤 태도가 변했다”면서 “두 번째 방중은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실망스럽다”고 했다. 트럼프는 35분간 회견에서 수차례 북·미회담 무산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이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문 대통령은 “북·미 수교를 확신한다”는 등 동문서답했다. 문 대통령은 백악관을 나선 뒤 “한·미 정상회담이 잘됐다”고 평가까지 했다.

트럼프는 영어발음이 매우 정확하고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도 북·미회담 무산 전조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참모진의 분석력이 빵점이거나 외교커뮤니케이션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으면서도 그걸 놓친 것이다.

한용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