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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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사진 재유포자 석방 왜? "수사기관 '오버'에 제동"

서부지법 강희경 판사 "긴급체포 자체가 위법… 구속은 불가"
최근 성추행 피해를 호소한 유명 유튜버의 벗은 사진을 재유포한 혐의로 긴급체포됐던 20대 남성이 풀려났다. 구속영장 심사를 맡은 판사가 ‘위법한 긴급체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홍익대 누드모델 몰래카메라 사건 이후 일부 여성이 ‘경찰의 몰카 수사가 편파적’이라고 비판하자 이를 지나치게 의식한 경찰의 ‘과잉수사’ 시도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27일 유튜버 양예원씨의 벗은 사진을 내려받아 재유포한 혐의(성폭력범죄처벌법 위반)로 강모(28)씨에 대해 신청한 구속영장이 전날 법원에서 기각돼 부득이 강씨를 석방했다고 밝혔다. 서울서부지법 강희경(38·여·사법연수원 36기) 판사는 “경찰의 긴급체포 자체가 위법해 이에 기초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한다”고 짤막한 기각 사유를 내놓았다.

형사소송법상 긴급체포는 피의자가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 징역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인멸 혹은 도주 우려가 있으며, 체포영장을 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에만 할 수 있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지난달 초 한 파일공유 사이트에서 양씨 사진을 내려받아 다른 공유 사이트에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지난 23일 오후 11시쯤 강씨를 대전의 집에서 긴급체포했는데 법원은 긴급체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았다, 즉 경찰이 ‘오버’를 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홍익대 남성 누드모델의 벗은 사진을 유출한 20대 여성이 경찰에 구속되면서 일부 여성 사이에 ‘경찰의 몰카 사건 수사가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여성이 피해자인 거의 대부분의 몰카 사건은 수사를 느릿느릿 진행하더니 남성이 피해자인 몰카 사건이 벌어지자 이례적으로 신속히 수사해 피의자를 전광석화처럼 구속했다는 것이다. ‘경찰의 몰카 수사가 성차별적’이라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지난 19일에 이어 전날도 혜화역 부근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경찰은 여성이 피해자인 다수 몰카 사건도 철저하고 엄정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이에 위기감과 부담을 느낀 경찰이 여성을 상대로 한 몰카 사건도 열심히 수사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조바심을 낸 듯하다. 법조계는 긴급체포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는 남성 피의자를 경찰이 서둘러 긴급체포했다가 법원의 제지를 받은 것으로 본다. 몰카 등 성범죄 사건의 신속한 수사와 가해자의 엄중한 처벌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억울한 인권침해도 있어선 안 된다고 법원이 수사기관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풀이된다.

경찰의 부당한 긴급체포를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한 강희경 판사는 전부터 소신있는 판결로 이목을 끌어온 법관이다. 지난해 7월에는 남성을 ‘한남충’(한국 남자는 벌레)이라고 부른 여성 A씨가 모욕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유죄를 인정하고 A씨에게 벌금 30만원을 선고했다. A씨는 “한남충이란 한국 남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범위가 매우 넓어 모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항변했으나 강 판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 판사는 판결문에서 “한남충이란 표현에서 ‘충’은 벌레라는 뜻으로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고 A씨를 꾸짖었다.

지난해 11월에는 술에 취해 차 안에서 잠에 들었다가 실수로 기어를 건드려 접촉 사고를 낸 남성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B씨는 만취 상태에서 차에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켜둔 채 잠을 자다가 그만 차가 앞으로 이동해 주차돼 있던 다른 차량과 부딪히면서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강 판사는 “자동차 안에 있는 사람의 의지나 관여 없이 자동차가 움직인 경우에는 운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술에 취한 상태에서 고의로 운전을 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고 달리 범행을 인정할 증거도 없다”고 판시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