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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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5월28일~6월3일) 콘스탄티노플 성벽

1453년 5월29일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튀르크군에 함락돼 동로마가 망한 사건의 의미를 두고서는 많은 평가가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했다는 평가다.

그해 4월2일부터 시작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방전의 양상 자체가 그렇다. 그것은 중세를 상징하는 성벽과 근대를 상징하는 대포의 대결이 두드러진 싸움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은 튼튼하기로 유명해서 특히 그랬다. 더욱이 3면이 바다(보스포루스해협)에 면해 있어 1면만 방어하면 되기에 당시 유럽지역에서 가장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졌다.

대포의 경우도 그랬다. 대포는 그 전부터 있었으나 아직 포탄이 폭발하는 식의 대포는 미비했기에 공성전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튀르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복왕으로 꼽히는 메메트 2세 치하에서 대포는 ‘근대화’를 겪는다.

그는 헝가리 출신의 대포 전문가 우르반을 고용해 길이 8m에 직경 75㎝의 엄청난 대포를 만들었다.

이 대포는 544㎏의 바위 같은 돌을 쏠 수 있었다. 물론 그 ‘포탄’은 폭발은 하지 않았으나 견고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흔들기에는 충분했다.

로마가 게르만족에게 위협을 받자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 이를 피하기 위해 건설해 원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던 이 도시는 1100여년 만에 튀르크족의 손에 멸망한 것이다. 그 마지막 황제도 동명인 콘스탄티누스 11세였다.

그 뒤에도 동서양의 성벽들은 줄곧 ‘황성옛터’ 같은 폐허가 돼 가면서 기사나 사무라이 같은 무사들의 위세도 사라져 갔다.

동로마에서 쫓겨난 문화예술인들이 서구로 가서 그리스 문화를 재현함으로써 르네상스를 맞기도 했다. 게다가 지중해 동부를 빼앗긴 서구가 대서양 쪽으로 진출해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근대는 더욱 본격화한다.

양평(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