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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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당신은 진정한 축구팬인가

이른 열대야가 닥친 대구의 밤은 후덥지근했다. 지난달 28일 축구대표팀이 온두라스와의 평가전을 치르던 날, 대구 스타디움 인근에선 교통 혼선이 빚어지며 행여 늦어 입장을 못할까 발을 동동 구르는 팬들도 여럿 보였다.

간신히 제 시간에 맞춰 스타디움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기자의 옆을 휙 지나쳐 가는 팬들은 필사적이었다. 멀찌감치 차를 대놓고서 경기 장면을 1초라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달음박질을 친 것이다. 밤공기는 무더웠고, 결코 산뜻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캐한 숨을 헐떡거리면서 태극전사들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은 “팬들은 열두 번째 선수”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안병수 문화체육부 기자
여기까지만 보면 팬과 선수의 사이가 이만치 애틋한 팀도 드물다. 반전은 그 다음이다. 2018 러시아월드컵 격전지로 떠난 선수들에게 쏟아진 반응은 조롱 일색이다. “어차피 3패”라는 자포자기식 비난부터 “단체로 러시아 관광을 떠난다”며 이죽거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팬심’이라면 시비를 정확히 가려보자. 팬들이 한국 축구에 보내는 따가운 시선은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다.

선수들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한국이 속한 월드컵 조별리그 F조 ‘최강’ 독일은 세계 최고 리그인 분데스리가가 근간이다. 같은 조 멕시코, 스웨덴 역시 탄탄한 자국리그를 통해 스타 선수들을 배출해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K리그 부흥기를 맞았던 1990년대 그라운드를 누볐던 안정환, 홍명보, 유상철 등이 2002 한·일 월드컵 4강신화의 주역이 됐다. 반면 현재 대표팀은 몇몇 선수들의 부상 탓에 제대로 된 엔트리를 꾸리지 못할 만큼 선수층이 얇다.

스타 부재에 시달리는 한국 축구의 쇠락기가 K리그의 몰락과 궤를 같이 한다면 과연 우연일까. 지난 시즌 K리그 경기당 평균관중은 6576명이다. 2012 시즌에 처음으로 1만명 선이 붕괴된 뒤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같은 기간 이웃나라 일본 J리그(1만8655명), 중국 슈퍼리그(2만4959명)와 비교해도 창피한 수준이다. 간단한 얘기다. 우는 아이도 구경꾼이 없다면 뚝 그친다. 좀처럼 ‘흥’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죽기살기식으로 뛸 선수가 나올 리 만무하다.

그런가 하면 대표팀 국내 평가전은 최근 단 2경기만으로 7만4500여명을 모았다. 관심과 애정의 불균형은 심한데 정작 대표팀에는 꾸준한 활약을 강요하는 셈이다. 물론 누구를 딱 집어 책임을 물릴 수는 없다. K리그의 발전을 등한시하고 파벌 싸움에 몰입했던 대한축구협회, 뚝 떨어진 인기만큼 투지까지 잃어버린 일부 선수들도 공범이다. 그러나 해외 축구에 열광하면서도 한국 선수는 외면했던 팬들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대표에 보내는 전폭적인 관심만으로 ‘한국 축구팬’의 책무를 다한 건 아니란 뜻이다.

한 K리그 현직 감독은 “월드컵 때만 한국 선수를 본대도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월드컵을 계기로 K리그 경기장 역시 붐볐으면 한다”며 씁쓸한 심정을 토로했다. 기자는 묻고 싶다. 당신은 한국 축구팬인가.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월드컵에선 그간 못 다한 응원을 보내는 게 도리 아닐까. 평소엔 거들떠보지 않다가 막상 ‘큰 일’ 때만 잘하라고 호통을 치는 건 너무 염치가 없지 않나.

안병수 문화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