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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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평양냉면과 남북관계

무더운 여름을 그나마 기다리게 하는 건 평양냉면이다. 여름철 시원한 평양냉면 맛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매해 여름을 넘기고서도 한 주에 한 번은 냉면집을 찾은 것 같다.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기자뿐일까. 한여름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새콤하고 담백한 평양냉면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사랑받는 별미다.

부모 세대, 할아버지 세대라고 다를 게 없다. 오죽했으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발간된 취미 월간지 ‘별건곤(別乾坤)’이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라고 했을까. 오늘날 북한 가요 ‘평양랭면 제일이야’도 “우리 겨레 함께 들며 통일의 날 당겨오네”라는 가사로 이념과 갈등을 초월해 평양냉면을 치켜세웠다.
김범수 사회부 기자

평양냉면 맛의 화룡점정은 ‘탄수(식초의 북한어)’의 비율이라고 생각한다. 탄수를 넣지 않은 냉면은 싱겁다. 그렇다고 탄수를 너무 많이 넣으면 먹기 힘들 정도로 자극적으로 변해 버린다. 각자 취향에 맞게 적당히 탄수를 넣는 것이 냉면을 먹는 가장 큰 재미다. 평양냉면 ‘1번지’인 북한 평양 옥류관에서도 손님이 입맛에 따라 탄수를 넣어 먹는 모습을 유튜브 등 동영상을 통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평양냉면은 남과 북을 하나로 엮어 주는 매개체인 것 같다. 분단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만 언젠가 통일이 되어야 할 남과 북이다. 남북 양측 사람이 커다란 놋쇠그릇에 평양냉면 2인분을 담아 나눠 먹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평양냉면을 맛있게 먹으려면 두 사람이 서로 취향을 알고 적정량의 탄수를 넣어야 할 것이다. 자칫 이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에러’가 날 수도 있다.

김대중·노무현정부 시절은 너무 갑작스럽게 마련된 식사 테이블에 평양냉면이 오른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서로 눈치만 보다가 탄수를 거의 넣지조차 못했다. ‘고난의 행군’ 돌파구로 핵무기 개발을 선택한 북한을 상대로 우리 정부는 비핵화 요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냉면의 맛은 밍밍할 뿐이었다. 못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먹고 나면 입 구석이 어딘가 심심해 다른 음식이 생각났다. 당시 정부는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 금강산 관광 등 성과를 이뤄냈지만 북한 핵개발을 막지 못하는 에러를 내고 말았다.

이명박·박근혜정부 시절 남과 북의 식탁에 차려진 평양냉면은 입도 대기 힘들었다. 서로 배려하지 않고 남과 북이 각자 마음대로 탄수를 넣다 보니 시골 똥개 누렁이도 못 먹을 자극적인 맛이 돼버렸다.

서로 대화가 없으니 이 기간에 천안함 폭침사건, 연평도와 서부전선 포격 등 군사적 도발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이른바 ‘종북’ 몰이를 했고 북한도 장성택 등 ‘반동분자’ 숙청에 나섰다. 탄수는커녕 냉면에 시뻘건 다대기를 진하게 푼 꼴이다.

문재인정부는 과거를 교훈삼아 탄수 비율을 잘 조절해야 한다. 지금의 평양냉면 오찬에는남과 북의 대표는 물론 외국 정상까지 함께 하고 있다. 이 와중에 문 대통령 별명이 ‘네고시에이터(협상가)’다. 우리 정부가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협상가답게 식탁에 둘러앉은 손님들 입맛을 알아내 적절한 탄수 비율로 완벽한 평양냉면을 만드는 ‘셰프’의 역할을 잘해냈으면 한다.

김범수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