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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스토리] 핵심만 콕콕! 긴 것은 NO!… ‘요약’에 빠진 현대인들

SNS시대 생활리듬 빨라져 / 영화·책 등 주요 내용 축약 / 짧게 편집된 영상·글 인기 / “사고력 감퇴” 우려 시각도 / 직장인 절반 압축 글·영상 소비 경험 / “유튜브 등 유통경로 다양화” 분석 / 언론도 카드뉴스·기사요약 등 내놔 / 사물 관찰·분석 능력 무뎌질 수도 / 성인 5명 중 1명 글 이해력 떨어져 / 가공자 입맛 따라 본질 왜곡 우려도
#1. 최근 직장인 김모(32)씨는 영화를 요약해 놓은 유튜브 영상을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짧게는 5분, 길게는 30분 남짓 주요 장면 위주로 재편집한 영상이다. 분량은 짧아도 핵심만 콕콕 집어낸 덕에 몰입감은 실제 영화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김씨는 이런 식으로 한 주에 3∼4편 영화를 본다. 그는 “요즘에는 편집이 워낙 잘돼 있어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본 느낌”이라고 말했다.

#2. 대학생 최모(20·여)씨는 이번 학기 리포트를 작성할 때 이른바 ‘북스타그램’들 덕을 톡톡히 봤다. 독후감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굳이 책을 사 보지 않더라도 간단한 해시태그(#) 검색만으로 책 내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이 다소 어려운 전공서적은 리포트 공유 사이트에서 2000∼2500원을 내고 요약본을 구매했다. 책을 직접 읽고 해석하기보다 누군가 요약·정리해 놓은 글에 조금씩 살을 붙이는 게 시간적으로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생활 리듬이 빨라지면서 ‘한입 크기’로 만들어진 요약형 정보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긴 글 아래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세 줄 요약’은 온라인 세상의 문법이 된 지 오래다. ‘스마트’한 세상이 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타인의 생각이나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됐지만, 정작 이 과정에서 ‘나의 생각’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요약형 정보에 더 손길”

22일 세계일보가 취업포털 인크루트에 의뢰해 직장인 등 212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요약 영상을 통해 ‘영화나 책 등을 소비해본 경험이 있다’는 응답(52.2%)이 절반을 조금 넘었다.

전체 응답자의 85.4%가 영상이나 글을 볼 때 본문이 많을 경우 ‘요약형 정보’(원문을 핵심 위주로 간추린 정보)를 더 선호한다고 답했다.

요약형 정보를 선호하는 이유(복수 응답)로는 ‘핵심만 알면 된다고 생각해서’(28.4%),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27.8%), ‘내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22.4%), ‘원문을 읽기 귀찮아서’(14.7%) 등을 들었다. 이미 요약된 정보를 수용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보를 편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전체의 62.1%가 ‘타인을 위해 내용을 요약해 본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타인의 이해’, ‘나 스스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각각 41%, 31%였고, ‘지적인 만족감을 얻기 위해’(7.1%) 등의 대답도 있었다.

이처럼 요약형 정보의 공급과 수요가 많아진 것은 정보 유통 경로가 다양해진 데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로 분석된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는 “방대한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욕구는 과거에도 존재했다”며 “지식을 쉽게 검색할 수 있는 인터넷과 유튜브 등 플랫폼이 확산함과 동시에 잘 요약된 정보들을 생산·소비하는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장인 이모(29)씨는 “글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던 가상화폐 시스템도 유튜브 영상 2∼3개를 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며 “시간을 아껴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요약된 정보에 손이 가곤 한다”고 말했다.

유튜브만 놓고 보더라도 올 들어 책이나 영화 줄거리를 5∼10분 안팎으로 요약한 영상을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북튜버’나 ‘영튜버’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다. 영화 분야에서만 현재 200여명의 유튜버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맛보기’ 정도로 소개하던 과거와 달리 영화의 결말까지 모두 공개하는 콘텐츠들이 인기다.
이미지와 그래프 등을 활용해 뉴스를 스토리텔링해 보여주는 ‘카드뉴스’는 이미 보편화된 보도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다룬 본지의 ‘카드뉴스’ 첫 화면 모음.

◆‘맞춤형 뉴스’ 내놓는 언론들

사실 이런 현상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곳이 바로 언론사다. 신문을 사서 보는 독자가 급격히 줄어든 데 반해 클릭이나 손가락 드래그 몇 번으로 기사를 순식간에 소비하는 독자가 많아지면서 짧고 임팩트 있는 ‘온라인 맞춤형’ 기사를 제공하는 것이 뉴스 유통의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 1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뉴스 이용자들은 스마트폰으로 보는 기사의 적정 길이로 약 400자 분량(43.9%)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800자(28.0%)와 200자(19.3%)가 그 뒤를 이었는데, 분량으로만 따지면 건조하게 사실관계만 다룬 ‘스트레이트성 기사’ 위주로 뉴스를 소비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 셈이다.

여기에 발맞춰 나타난 것이 ‘카드뉴스’다. 네이버 검색엔진을 통해 올해 1월 1일부터 이날까지 포털에 제공된 각사의 ‘카드뉴스’를 분석한 결과, 하루 평균 48.3개(총 8363건)의 카드뉴스가 제공됐다.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15개 안팎의 이미지 컷이 활용되는데, 활자 기사를 다루는 매체들이 주도하고 있음에도 컷마다 들어가는 글자는 최대한 줄이려 하고, 이미지나 그래프 등 인포그래픽을 다수 활용하는 게 특징이다.

해외에서는 아예 ‘기사 요약’ 기능을 내놓는 언론사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올 초 일본 시나노 마이니치 신문은 대형 IT(정보기술) 기업인 후지쓰와 협력해 기사를 자동으로 요약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 소프트웨어는 인공지능(AI)의 기계 학습 기술을 바탕으로 기사의 중요한 부분을 선별하고 각 문장의 중요도를 평가해 요약 기사를 내놓는다.

2013년 미국 야후가 당시 17세 소년 닉 달로이시오가 만든 뉴스 요약 애플리케이션 ‘섬리(Summly)’를 약 3000만달러(약 330억원)에 사들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AI를 바탕으로 새로운 단어를 이용해 본문 내용을 추리는 ‘생성 요약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네이버·다음 양대 포털 모두 기사를 세 문장 안팎으로 요약해 주는 시스템을 도입해 운영 중이다. 다만, 원문 일부를 ‘추출’하는 정도여서 활용도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생각하는 능력 무뎌질 수도…”

요약된 내용을 보고 관련 지식을 빨리 습득하는 것이 시간상으로는 효율적이지만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점점 짧고 정돈된 지식 위주로만 학습하다보면 사물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분석하거나, 직접 생각하는 능력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보 가공자의 능력이나 입맛에 따라 본질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될 여지도 적지 않다. 대중문화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문화)는 “이른바 ‘교양주의’의 영향으로 현대인들이 지식을 습득할 필요성은 느끼는데, 방법도 모르고 시간도 아끼고 싶어 나타나는 모습들로 볼 수 있다”며 “미래에는 AI가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될 텐데 깊이가 얕은 지식을 축적하는 데에만 매몰되면 인간만이 가능한 ‘사유’의 영역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글을 읽고 제대로 이해했는지를 측정하는 ‘성인 문해능력 조사’(2017)에서 우리나라 성인 5명 중 1명이 일상생활에서 다소 미흡한 문해력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 점도 이런 요약 선호 현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복잡한 글을 피하고 주어진 정보를 직접 분석하는 훈련이 부족하다보니 나타난 문제라는 것이다.

반면, 과거와 달리 요즘 세대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다양해지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크게 문제될 것 없다’라는 의견도 있다. 김석범 수원대 교수(공연영상학)는 “영화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20분짜리 요약 영상으로 영화를 다 봤다고 하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또한 지금 대중이 영화를 즐기는 한 방법”이라며 “미디어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정보를 습득·활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설동훈 교수는 “요약된 정보만 습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디딤돌 삼아 특정 분야에 더 관심을 갖고 전문적이고 필요한 지식을 얻게 되는 사례가 많고, 정보에 대한 태도가 바뀌면서 나타난 모습들이기에 꼭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며 “다만, 정보 이용자들이 정보의 진위나 전문성을 잘 가려내 정보를 수용하는 태도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