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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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佛 ‘굴욕의 날’ 6월25일

“프랑스 오픈 대회 때만 오는 게 아니라 휴가도 파리에서 보냈어요. 파리의 거리를 걷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여자 테니스 세계 랭킹 1위이자 올해 프랑스 오픈 챔피언인 시모나 할레프(27)가 외신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녀가 루마니아 출신이라는 점에 새삼 눈길이 갔다. 슬라브족이 대세인 동유럽에서 유독 루마니아만 프랑스와 같은 라틴족 혈통이다. 그래서일까, 루마니아인들의 프랑스 사랑은 예로부터 유별난 데가 있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2000년대 초반 루마니아에 근무한 어느 중견 외교관의 회상이다. “주말에 자녀를 데리고 부쿠레슈티 시내 공원을 산책하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낯선 동양인인 내게 프랑스어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곤 했다.” 지금이야 영어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루마니아 학교는 프랑스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쳤다.

그런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나치 독일에 무릎을 꿇은 건 루마니아인을 포함해 파리를 사랑하는 모든 외국인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1940년 5월 시작한 프랑스와 독일의 전투는 단 6주일 만에 독일의 압승으로 끝났다.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국토의 3분의2를 독일군이 점령하고 그 비용은 전액 프랑스가 부담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휴전조약이 체결돼 그해 6월25일 정식으로 발효했다. 사흘 뒤인 6월28일에는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난생 처음 파리를 방문해 에펠탑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돌아갔다.

프랑스 전역에서 총성과 포성이 멎은 1940년 6월25일 그간 프랑스가 추구해 온 자유·평등·박애의 가치도 함께 종말을 고했다. ‘만인의 연인’에서 ‘피점령지’로 전락한 파리의 거리는 정적만 감돌았다. 6·25는 비단 한국인한테만 쓰라린 날인 것이 아니다.

한때 영국과 더불어 세계를 호령한 프랑스가 개전 후 2개월도 채 안 돼 무너진 건 국론분열과 군사적 무기력 탓이었다. 우파는 “히틀러가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에서 서유럽을 지켜줄 것”이라며 나치 독일과의 화친에 매달렸다. 좌파도 “전쟁이 나면 노동자 삶이 더욱 피폐해질 것”이라며 무작정 평화만 외쳐댔다.

전쟁에 돌입한 순간 프랑스 군대는 패배주의에 휩싸여 있었다. 프랑스 한 소도시 점령에 참여한 어느 독일군 병사는 훗날 수기에서 “한 무리의 프랑스 장병들이 우리(독일군)가 진입하면 항복하려고 무기도 버린 채 카페에 앉아 무작정 기다렸다”며 “그것이 이른바 ‘대국’(프랑스)의 면모였다”고 비웃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호국보훈의 달’인데 올해는 예전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온통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유예 또는 중단을 알리는 소식뿐이다. 물론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분단 70년, 정전 65년의 적대관계가 정상들 간의 잘 연출된 몇 차례 만남만으로 쉽사리 해소될 순 없는 노릇이다. 1938년 뮌헨회담에서 평화를 얻었다고 착각한 프랑스인들이 2년 뒤 직면한 것은 전쟁과 패배, 그리고 오갈 데 없는 망국민 신세였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고대 로마제국의 격언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없는 듯하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