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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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온몸 짜릿하게… 하늘로 가는 길

완주에서 길을 만나다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란 후회가 수십 번 들 수 있다. 반면 이왕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보자란 생각도 수십 번 든다. 그런 사이 어느새 중간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돼 버렸다. 이쯤 되면 밑을 보지 말아야 한다. 뒤돌아보는 순간, 수백m 상공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바람이 불어 느끼는 시원함 외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서늘함이 동시에 전해진다. 밑에서 봤을 땐 금방 도착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후회를 해도 내려가는 것보다는 올라가는 것이 더 낫다. 힘들더라도 멈추면 다시 발을 옮기기 힘들 수 있으니 천천히라도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끝까지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한여름 담력훈련이 따로 없다. 등장인물은 본인 외에 없지만 웬만한 공포물보다 더 섬뜩하다. 달랑 계단을 오르는 것일 뿐인데 덥다란 생각은 온데간데없다.

전북 완주 대둔산 삼선계단은 오를 수만 있는 일방통행길이다. 총 길이 36m, 계단 127개, 경사 51도다.
반전 있는 아찔한 산행을 원한다면 전북 완주 대둔산이 제격이다. 대둔산은 충남 금산과 논산, 전북 완주에 걸쳐 있다. 정상 마천대까지 금산과 논산, 완주에서 각각 오를 수 있다. 논산과 금산 쪽은 계곡이 좋고 능선이 완만하다. 반면 완주는 기암괴석의 바위산이다. 완주에서 산을 타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 있어 한결 오르기 수월하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후 산을 오르면 ‘아차’ 싶은 곳을 마주하게 되는 곳이 완주 쪽이다. 다른 산들이 험하거나 멋있는 풍광을 품고 있다면 대둔산은 아찔한 산행, 아름다운 풍경, 아릿한 사연으로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삼선계단은 오르기 시작하면 계단 중간에서 멈추지 않아야 무서움을 덜 느끼며 빨리 오를 수 있다.
◆한여름 아찔한 산행

아래서 올려다봐도 봉우리와 기암단애 등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케이블카 하부정류장에서 상부정류장까지는 금세다. 5∼6분 정도 타고 가면 상부정류장에 이른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정류장에서부터 바로 걸어 오른다면 하부정류장 왼쪽 길로 가면 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상부정류장에서 내리면 금강구름다리를 거쳐 마천대 방향으로 향해야 한다. 정류장 위 휴게소를 지나면 구름다리 이정표가 있다. 이곳부터 대둔산 최고의 풍광을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암벽길을 지나면 금강구름다리와 바위에 걸려 있는 삼선계단, 기암괴석들이 이루는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강구름다리는 길이 50m의 철제다리로, 해발 670m에 놓여 있다. 구름 다리 중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천 길 낭떠러지’란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바람이 강하게 불면 철제 다리이지만 흔들린다. 발은 다리를 딛고 있지만 허공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전망대 역할을 하는 작은 바위에 오를 수 있다. 바위에 올라서 보면 구름다리의 아찔함이 더 확연히 다가온다. 이미 지나왔으니 무서움보다는 암봉 사이에 걸쳐 있는 구름다리와 산 아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잠깐의 두려움만 이겨내면 한 폭의 산수화가 자신의 것이 된다.

너덜바위로 이뤄진 돌계단을 오르면 약수정 휴게소에 이른다. 여기선 고민에 빠진다. 왼편으로는 대둔산 산행의 하이라이트인 삼선계단 가는 길이다. 일단은 그 길로 가보고 다시 돌아와도 된다. 계단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으면 가면 되지만, 만약 자신이 없다면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된다. 삼선계단은 오를 수만 있는 일방통행길이다. 총길이 36m, 계단 127개, 경사 51도다. 오르기 시작하면 계단 중간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 좋다. 끝없는 낭떠러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오를 때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계속 오르면 살 수 있다는 일말의 안도감이 교차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발은 계속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이런저런 푸념을 하다 보면 계단 정상이다. 탄성은 기본이다. 눈 아래 구름다리와 다양한 기암괴석들, 멀리 보면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펼쳐진 풍광에 감탄하며 서 있게 된다. 오래 서 있을 순 없다.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다른 이들을 위해선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삼선계단은 삼선바위가 있어 이름 붙었다. 고려말 한 재상이 딸 셋과 함께 이곳에 들어와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여생을 보냈고, 딸 셋이 선인으로 변해 삼선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비비정예술열차는 무궁화호 4칸을 철교 위에 올려놓고, 예술 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상 마천대까지는 많이 멀지 않다. ‘하늘을 어루만질 만큼 높다’는 뜻의 마천대 높이는 878m다. 원효대사가 이름 붙였는데, 마천대에는 ‘개척탑’이 솟아 있다. 1970년 완주 주민들이 직접 자재를 운반해 세운 10m 높이의 탑이다. 정상에서는 칠성바위, 왕관바위 등 사방으로 솟은 기암들의 절경이 펼쳐진다. 정상에서 내려올 땐 금강구름다리와 삼선계단을 지나지 않고 등산로로 내려가야 한다. 케이블카 왕복티켓을 구매한 뒤 걸어 내려온다면 하부정류장에서 일부 요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

◆아픈 역사의 아릿한 흔적

대둔산은 인적이 드문 두메산골의 험준하고 큰 산봉우리라는 뜻의 한듬산이 원래 이름이다. 명당자리를 계룡산에 뺏겨 ‘한이 들었다’해서 ‘한듬산’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한듬산이란 이름을 문서에 남기는 과정에서 ‘큰 대(大)’와 ‘진칠 둔(屯)’자를 쓰면서 이름이 대둔산으로 바뀌게 됐다. 명당자리뿐 아니라 원래 불렸던 이름조차 뺏겨 산이 한을 품은 것일까. 대둔산은 우리 역사의 많은 우여곡절이 벌어진 곳이다. 막연히 멋진 풍광만 품은 곳이 아니라 옛 아픔이 서려 있기에 더 애달프게 다가온다.

완주 비비정예술열차가 있는 철교 중간까지 걸어가면 강 위에 놓인 철교와 평야를 가로지르는 기찻길의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임금이 있는 한양 외에 군량미 확보를 위한 곡창지대 호남을 노렸다. 왜적들은 전라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 이치를 공략했다. 이치는 대둔산 중허리에 있는 고개다. 배나무 많아 ‘배재’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권율 장군과 의병 1500명은 왜적 1만 병력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고 많은 희생 끝에 이겼다. 이 전투에 패한 왜적은 전주 방면 침공을 포기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한산도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을 말하는데, 권율은 사위인 이항복에게 “내가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이치대첩이 최고이고 그다음이 행주대첩이다”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조선말에는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한 동학 농민군들 중 20여명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대둔산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이다 대둔산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 삼선계단에 가기 전 ‘대둔산 동학군 최후 항전지’ 표시가 있다. 농민 군중 접주 김석순은 한살배기 딸내미를 품에 안고 벼랑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당연한 꿈조차 과분했던 것일까. 걷지도 못하는 딸을 살리기보다 ‘역적의 피’라며 온전치 못한 삶을 살 것을 우려한 ‘애비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진다. 6·25전쟁 때는 빨치산들의 활동무대로 민초들의 한이 그대로 서려 있는 곳이 바로 대둔산이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일제강점기 양곡창고였으나 다양한 문화예술을 체험·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둔산뿐 아니라 완주 곳곳에는 민초들이 고통받은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변해 당시의 아픔을 그대로 느끼긴 힘들지만, 그래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삼례문화예술촌과 비비정이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양곡창고였으나 다양한 문화예술을 체험·감상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는 전북 지역에서 수탈한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실어 보냈는데, 그 쌀을 보관하던 곳 중 하나다. 일곱 동의 건물이 1920년대 지어졌고, 1970년대까지 양곡창고로 활용되다 주변이 개발되며 양곡창고 기능을 상실했다. 지역 예술인들은 이곳을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예술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문화체험장으로 만들었다. 오래된 벽체와 함석지붕, 높은 천장을 지탱하는 나무구조물 등은 예술작품을 연상케 한다. 어울마당을 중심으로 양곡창고는 모모미술관, 디지털아트관, 소극장씨어터애니, 체험공간 뭉치, 김상림 목공소, 문화카페 뜨레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던 쌀은 기차를 통해 군산항으로 옮겨졌다. 이 기찻길이 비비정을 들렀다. 비비정은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고, 소양천과 고산천이 만나 만경강이 시작되는 한내라는 언덕 위에 있는 정자다. 정자에서 만경강을 내려다보는 풍광도 멋지지만,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옛 철교 위 비비정예술열차가 더 눈길을 끈다. 무궁화호 4칸을 그대로 가져와 철교 위에 올려놓고, 예술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철교 중간까지 갈 수 있는데, 강 위에 놓인 철교와 평야를 가로지르는 기찻길의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벌겋게 녹슨 철교로 대표되는 수탈의 흔적이 지금은 낭만의 공간을 탈바꿈한 것이다.

완주=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