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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스토리] 콧대 높던 금융맨… 블루칼라도 부러웠다

명퇴자 쏟아지는데 … / 작년 8개 은행 5117명… 두배로 껑충 / 신입 채용 압박에… 올해도 ‘러시’ 예고 / 수천명 명퇴자 중 재취업 성공 15%뿐 / 절반은 경비·운전·건설 등 非사무직 / 노후 고민은 많지만 … /“남은 인생 길다” 대다수 재취업 희망 / “제2직업 준비하고 있다” 10% 불과 / 은행권 퇴직금 적잖아 방심하기 쉬워 / 자영업·금융투자 손댔다 파산도 많아
은행 직원 3명 중 1명은 퇴직 후 재취업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9일 세계일보가 주요 시중은행 직원 11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6.1%는 퇴직 후 재취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재취업을 고려하는 이유로는 생활비 마련(61.8%)이 가장 많았다. 자아실현(20.6%), 건강관리(5.9%), 인맥 네트워크 형성(3.9%)이란 답변이 그 뒤를 이었다. 은행원은 고소득 화이트칼라 직업의 전형으로 꼽히지만 직업 안정성은 높지 않다. 명예퇴직이 금융권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재취업에 대한 의지는 강했다. 경제적 이유와 함께 무료함이나 기존인맥의 상실로 인한 공허함 같은 정신적 이유도 은행원들의 재취업 의지를 높이는 요인인 것으로 조사됐다.

◆은행 명퇴자들, 블루칼라 직종도 마다하지 않아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주요 시중은행 8곳에서 명예퇴직(명퇴)을 한 직원들은 총 5117명으로 2016년(2326명)의 2배가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올해는 시중은행의 명퇴 바람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이 문재인정부의 일자리 창출 기조에 따라 명퇴 대상을 늘려서라도 신입행원의 일자리를 늘리라고 금융권에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도 명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은행 관계자는 전했다. 임금피크 대상이 되는 직원들은 근속기간에 따른 퇴직금에 더해, 3년 정도의 연봉을 위로금으로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후 준비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퇴직금을 중간정산해서 자녀 결혼비용 등으로 써버린 경우가 많은 데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노후 필요 자금도 덩달아 늘어나기 때문이다. 재취업을 통해서 생활비에 충당하려는 은행 퇴직자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은행 퇴직자들이 선호하는 재취업 기관은 은행권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주택금융공사, 서민금융진흥원과 같은 금융기관 등이지만 이곳에 재취업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재무관리나 자산컨설팅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사무직 재취업은 성공 사례가 극소수에 불과했다.

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의 최근 집계자료(2016년 말 기준)에 따르면 분석대상(노사발전재단, 취업상담인 2081명) 가운데 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전체의 15%가량(311명)이었다. 이들 중 경영회계 사무직으로 취직한 사람들이 30%, 금융보험 관련직이 23%로 절반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나머지는 경비 및 청소 관련직(12%), 영업 및 판매 관련직(7%), 생산단순직·운전·건설 등(28%)으로 다양하다. 도배나 목공, 미장 기술을 익혀 블루칼라로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사례도 많았다.

시중은행에서 26년간 근무한 후 지난해 1월 명예퇴직을 한 신모(54)씨도 타일도배와 목공 기술을 익혀서 전직에 성공한 사례다. 평소 손재주가 좋았던 신씨는 취미를 살리며 지속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서 만족감을 나타냈다. 김도영 KB경력컨설팅센터장은 “제2의 직업은 본인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며 “과거의 직위, 명예, 무용담 등에 얽매여 직업 선택의 폭을 지나치게 줄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재취업 준비하는 은행원, 열에 한 명꼴도 안 돼

대다수 은행원이 재취업을 원하지만 정작 재취업 준비를 하는 직원들은 열에 한 명꼴도 되지 않았다.

세계일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제2의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9.8%에 불과했다. 대개는 ‘보통이다’(25.9%), ‘그렇지 않다’(36.6%), ‘전혀 그렇지 않다’(27.7%)고 답변했다. 은행원들의 경우에는 퇴직금과 명퇴금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재취업 준비에 소홀할 수 있다는 게 경력 컨설턴트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아둔 돈이 줄어드는 것에 불안함을 느낀 퇴직자들이 준비 없이 자영업에 뛰어들거나 고위험 금융투자에 나섰다가 파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실제로 세계일보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퇴직 후 재취업하고 싶은 분야’를 묻는 문항에 요식업·제빵·커피를 비롯해 자영업이라고 답한 경우가 금융업과 부동산 컨설팅 등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은행에서 10여년 전 명퇴를 한 후 퇴직금을 쏟아부어 식당을 개업했던 백모(62)씨는 식당이 망하면서 지금은 택시를 몰고 있다. 백씨는 “은행원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시스템 속에서 일하면서 리스크를 방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며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의외의 변수들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는 것이 서투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본인이 숫자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남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돌발과 예외가 속출하고 속임수가 판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금융기관의 프로세스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제대로 적응하기 어렵다고 백씨는 조언했다. 백씨의 충고는 은행원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큰 직장에서 오랜 시간 근무해 온 화이트칼라 직장인들도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세계일보의 조사에서는 ‘퇴직 후 원하는 분야로의 재취업은 용이하다고 보느냐’는 문항에 29.5%가 ‘그렇지 않다’, 14.3%가 ‘매우 그렇지 않다’고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은 16.1%에 불과했다. 명퇴하면 떠올리는 단어로는 절망, 파산, 불안감이 많았다.

김라윤 기자 ry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