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볼 수 있기보단,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허락된 풍경을 본다는 감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동안 봐온 여행지에서 접하던 웅장하거나, 시원하게 펼쳐진 풍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이런 ‘태고의 모습’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점차 폭이 넓어져 하천을 이룬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하천은 다른 하천들과 얽히고설켜 강이 된다. 그 강은 흘러흘러 독특한 물돌이를 만들고, 더 넓은 강과 합쳐진다. 이처럼 시내가 천이 되고, 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강물의 흐름을 보며 감탄을 하고, 상념에 빠진다. 그만큼 순리대로 흐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그럴 것이다.
병방치에 오르면 한반도 지형의 땅을 감싸안고 흐르는 동강의 비경이 눈에 들어온다. |
◆‘태고의 모습’ 품은 이끼계곡
두메산골의 여름철 피서라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계곡이 떠오른다. 장전계곡은 행정구역으로는 평창이다. 정선과 인접한 곳으로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는 정선으로 빠져나와 동강 지류인 조양강을 만난다.
가리왕산 줄기 장전계곡은 이맘때 완전히 제 색으로 갈아입는다. 계곡의 색이 뭘까 싶은데, 장전계곡의 다른 이름이 장전 이끼계곡이다. 다른 계곡들도 군데군데 이끼들이 있지만, 차원이 다르다.
강원 평창과 정선을 흐르는 장전 이끼계곡은 이맘때 완전히 제 색으로 갈아입는다. 울창한 나무로 뒤덮인 부분에 이르자 다른 색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주위를 온통 초록세상으로 만든다. |
이끼계곡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고된 산행을 각오해야 할 것 같지만, 바로 근처까지 차로 갈 수 있다. 이끼계곡 부근에 이르면 표지판이 서 있고, 그 뒤편부터 초록 세상이다. 수천, 수만년 여름이면 계곡을 덮었다 겨울이면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찾는 이에게 어렴풋이 나마 ‘태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찾는 이의 부주의로 제 모습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 나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다른 이들도 누려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높은 절벽을 병풍 삼은 아담한 대촌마을. |
조양강과 만나는 다른 지류 중 하나가 어천이다. 정선을 흐르는 이 지류에선 계곡을 품고 있는 아늑한 마을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외진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정선읍에서 화암면 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왼편에 높은 절벽을 병풍 삼은 아담한 마을 하나가 나온다. 계획에 없던 여행지를 찾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마음에 쏙 드는 풍경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한적한 대촌마을 풍경. |
대촌마을에서 다양한 ‘뼝대’를 만날 수 있다. |
강원도의 강은 산을 돌아 굽이치고, 구불구불 흐르는데 그 주변으로 바위 절벽이 서 있다. 이 절벽을 강원도에서는 ‘뼝대’라 부른다. 강원도의 뼝대와 물줄기가 어우러진 풍경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곳이 이 마을이다.
주민들은 이 풍경에 옥순봉, 제월대, 구운병, 반선정 등의 이름을 붙여 덕우팔경이라 부른다.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 촬영 장소. |
일제강점기 시절 반선정 주변 경치와 풍수에 반한 정선읍 사람이 정자를 없애고, 조상의 묘를 이장했다. 일본 헌병이 뒷배를 봐줘 마을 주민들은 불평을 하지 못했다. 묘를 이장한 뒤 마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을의 개들이 정자 있던 자리를 보며 수개월 동안 짖었고, 집들이 무너지는 등 마을에 흉조가 든 것이다. 결국 묘를 이장했고, 다시 정자가 들어섰다. 이후 마을은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반선정에서 무념무상의 시간을 보낸 후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람 키만큼 자란 밀밭을 만난다. 이 부근이 원빈과 이나영 부부가 식을 올린 곳이다.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면 만나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그동안 본 뼝대 중 가장 거대한 뼝대 제월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민들은 시계가 없던 시절 제월대에 달이 걸리고 넘어가는 방향과 높이를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고 한다. 어천을 따라 마을 곳곳을 둘러본 후 왔던 길로 돌아나오면 된다. 다시 반선정에 올라 풍경을 각인한 뒤 세속으로 나오는 것이 아쉬움이 덜할 테다.
정선 대촌마을은 바위절벽 ‘뼝대‘와 물줄기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을 품고 있다.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경치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엔 이만한 곳이 없을 듯싶다. 반선정에선 어천을 가로질러 놓인 징검다리와 뒤편의 뼝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
지류들이 모여 이룬 동강의 풍광을 보려면 병방치로 가면 된다. 뱅뱅이재로 불리던 고개로 과거 주민들이 정선읍에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뱅글뱅글 도는 길을 걸어 내려갔다고 해서 이름 붙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여행객. |
스카이워크는 U자형 구조물로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다르다. 발 아래 낭떠러지를 보지 않으려 해도 안 볼 수 없다. 눈을 감으면 경치를 포기해야 한다. 하늘을 걷는 듯한 아찔한 기분은 기본이다. 하지만 스카이워크에서는 나무에 가려 완전한 물돌이를 보기 힘들다.
5분 정도 더 나무데크를 오르면 만나는 전망대에서 더 확실한 물돌이를 볼 수 있다. 좀 더 스릴을 느끼고 싶다면 전망대 옆에 잇는 짚라인을 타면 된다. 시속 70∼80㎞로 1.1㎞를 활강해 생태체험학습장까지 단숨에 내려간다. 하늘을 나는 기분일지, 떨어지는 기분일지는 타보면 알게 된다.
하이원리조트의 스키장 슬로프엔 야생화가 만개해 있다. |
정선하면 아무래도 탄광 이미지가 크다. 40대 이상이면 기억할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의 무대 사북이 정선이다. 카지노 시설인 강원랜드가 들어서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강원랜드는 카지노로 알려져 있지만, 레저시설인 하이원리조트도 있다. 겨울철 눈으로 덮인 스키장 슬로프는 지금 야생화가 만개해 있다. 해발 800m가 넘는 지대에 있어 수레국화, 루드베키아, 샤스타데이지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걸어서 오를 수도 있고, 카트를 타고 돌 수도 있다.
워터파크도 개장했다. 파도풀, 바데풀, 슬라이드 등 놀이시설 16종과 스파, 건식 사우나 등을 갖췄다. 봄에는 야생화 투어, 여름은 물놀이, 가을엔 하늘길 트레킹, 겨울엔 스키를 강원랜드에서 즐길 수 있다.
삼척 방향으로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하이원추추파크는 국내 유일의 산악철도와 영동선을 활용한 기차테마파크다. 지그재그 철도를 달리는 스위치백트레인, 스위스의 산악열차인 인클라인트레인, 이색 미니트레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추추파크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는 폐역 ‘심포리역’은 고즈넉한 오솔길과 폐선된 철로를 걸으며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정선·평창=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