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마광수를 기억하며

‘술 때문인가… 벌써 이러면 어쩌지.’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황당해한 적이 있다. 고 마광수 교수가 쓴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읽기’(2013)가 두 권이나 떡하니 꽂혀 있었다. 두 권을 나란히 놓고 그간의 행적을 떠올려봤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같은 책을 왜 또 샀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도서 아래에 찍힌 도장마저 한 서점 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창수 사회부 기자
마광수의 책을 접한 건 지난해 9월 그의 죽음 이후였다. ‘마광수 자택서 사망.’ 당시 모종의 경로를 통해 입수한 정보를 이리저리 확인하다가 간발의 차로 1보를 놓쳐 내심 아쉬워한 기억이 난다. 연민이나 안타까움이 아니고 분명 아쉬움이었다. ‘남보다 먼저 보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자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죽음을 기삿거리 정도로만 여기게 됐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후로 서점에 갈 때마다 그의 책을 하나둘 펴보기 시작한 건 일종의 속죄의식 비슷한 것이었다. 소설에 워낙 문외한인지라 그의 대표작 ‘즐거운 사라’(1991)는 이름만 들어봤고 마광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음란한 책을 쓰다 구속된 괴짜’ 정도였다.

그의 글은 성격이 뚜렷했다. 쉬운 낱말에 문장이 짧아 속도감 있게 읽힌다. 어느 책을 보든 대개 지식인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인문학 비틀기’(2014)에서 그는 공자와 니체를 각각 ‘정치 만능주의자’와 ‘과대 망상가’, 톨스토이를 ‘이중인격자’라고 꼬집는다. 중세시대 종교를 뒷배로 이뤄진 인권 유린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석가모니와 예수를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선 옳고 그름을 떠나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성(性)에 대한 생각은 더 적나라하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시초가 된 사드 후작과 자허마조흐를 열렬히 예찬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사드 소설의 변태적 가학행위 묘사에 “인간을 구원할 새로운 해결책”이란 평가를 내리고, 자허마조흐의 소설에서 학대와 굴욕을 즐기는 주인공을 “행복한 남자”라며 부러워한다. 워낙 내용이 솔직한 데다 구어체가 많아 읽다 보면 오랜 친구가 된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가 글을 노골적인 투로 쓴 것은 아마도 ‘문학은 솔직한 일탈’이란 신념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저서 곳곳에서 “문학마저 도덕률의 틀에 갇힌 사회에서 오히려 위선이 판친다”고 주장해 왔다. 앞에서 체면만 차리는 지식인들이 뒤에서 ‘호박씨를 더 잘 깐다’는 거다. 얼핏 그의 문학이 평가절하를 당하는 현실에 대한 투정 같지만 올 초 학계와 문단에서 폭로된 성폭력 실태를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가끔 그의 ‘일관된 용기’가 부러울 때가 있다. 페미니즘이나 정치·경제 문제를 두고 동료 기자들과 대화할 때 전과 달리 말을 목구멍에서 삼키곤 한다. 소모적 논쟁이 피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얄팍한 밑천이 탄로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서다. 그래서 온갖 비난에도 끝끝내 자신의 소신을 지키고 솔직한 글을 써보인 마광수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책을 나도 모르게 두 번 집어든 것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즘 들어 그의 죽음이 더 아쉽기만 하다.

이창수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