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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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

#1. “내일 뵙겠습니다!” 째깍째깍 시곗바늘이 오후 6시를 가리키자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 더 일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여기저기서 퇴근인사가 오간다. 말단사원인 A도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칼퇴’에 성공한다. ‘가라 한다고 진짜 다 가버리네.’ 막내마저 번개처럼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부장 B는 격세지감을 느낀 듯 묘한 표정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떠나자 텅 빈 사무실 조명이 꺼지고 문이 닫힌다. 저녁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 주 52시간 근무를 위해 실시한 ‘PC 오프제’가 바꿔놓은 퇴근시간 풍경이다.

#2. “회식 장소가 어디라고?” “회사 앞 이태리식당입니다.” 부장검사 C는 두 귀를 의심했다. 신입인 D에게 회식 장소를 잡으라 했더니 파스타 집을 고른 것이다. 올해 47기 신규 임용 여검사 비율이 ‘열에 일곱’(66.7%)에 달할 정도로 여풍이 거세졌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좀 어색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대놓고 문제삼을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성 팀원이 절반 가까이 늘고 있는 시대에 피할 수 없는 변화란 생각이다. 그럼에도 회식 장소를 잡은 당사자가 선약이 있다며 쿨하게 ‘불참 선언’을 한 대목에서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지혜 산업부 기자
최근 만난 취재원들로부터 들은 몇몇 일화를 재구성해 본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당사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듣는 일은 흥미로웠다.

먼저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을 앞두고 PC오프제를 시행해 왔다는 한 대기업의 사례. 말로만 듣던 칼퇴가 특히 젊은 사원들 사이에서 현실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부장급에서 꽤 당황했다고 한다. 같은 연차 때 이런 날이 오리라 상상조차 못했던 이들에게 상당한 변화인 게 사실이다. 먼저 퇴근하지 않는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얼른 퇴근해”라고 말하는 건 분명 ‘집에 가지 말라’는 신호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비로소 사무실 구성원 대다수가 “얼른 퇴근해”를 “진짜 퇴근해”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자 당황하던 그 역시 별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조금씩 자연스럽게 전 직원의 칼퇴를 수용하게 된 지난 몇 개월은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한 걸음을 내딛은 시간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의 대표격이던 검사 조직에선 신입 절반 수준이 여검사가 되며 ‘파스타 회식’이 등장했다는 소식이다. 회식에 빠지겠다고 말하는 ‘미움받을 용기’도 나타났다. 점심 폭탄주도 옛말이 됐다. 이런 변화가 다소 낯설지언정 많은 경우 달라진 분위기에 적응하려는 훈련이 한창이라고 한다. 긍정적인 모습이다.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문화, 그 거대한 변화의 흐름은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불편함들이 모여 만들어 낸 ‘사회적 변화’는 때로는 명시적이고 때로는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의 소산이다. 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에 대한 대처는 온전히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책임 역시 개인 몫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야말로 진화냐 도태냐를 가르는 지점인 셈이다. 언제든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유연함, 변하는 것을 두려워 않는 용기, 어떻게 잘 적응할 것인지 모색하는 부지런함 등이 세부 항목이 될 것이다.

정지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