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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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내 삶의 시계는 낮 12시

#1. 택배 아저씨=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이었다.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아내와 딸이 나를 보더니 마주보며 키득거린다. ‘왜?’ 눈짓을 하니 다섯 살배기 둘째가 즐겨 듣는다는 노래를 들려준다.

“딩동 딩동 딩동 달려갔더니/ 우리 아빠 회사 다녀오셨네 (엄마)/ 언제쯤 오실까 언제쯤 오실까 언제쯤 오실까/ 우리 택배 아저씨 (보고싶어요).”
송민섭 정치부 차장

호기롭게 웃었지만 뒷맛은 씁쓸했다. 집에서 택배 아저씨보다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허탈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일터에서 상사에게 혼나고 후배에게 치여도 집안에선 “아빠 최고”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내심 일용할 양식을 버느라 밖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매일 늦는다고, 쉬는 날에는 잠만 잔다고 툴툴대는 가족이 서운했다.

#2. 어느 덧 중년=그제는 대학 때 같은 동아리였던 사람들이 용산의 한 고깃집에서 뭉쳤다. 시끌벅적하게 서로의 근황을 묻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20여년 전 함께 했던 그 시절을 반추했다. 술잔이 십여 순배 돌았을까. 자식 교육 등 집안 이야기와 노안, 흰머리, 지루성피부염 등 40대 중반 남성들의 장탄식이 이어졌다.

분명 불콰해진 낯을 식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밖으로 나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골프 이야기가 한창인데 금융기관 이사로 있는 선배가 무심한 표정으로 “요즘 늙음과 싸우고 있다”고 내뱉는다. 지지리 말을 안 듣는 중학생 딸을, 스펙은 훌륭한데 간혹 뒷목 잡게 만드는 젊은 직원들을 이해하려 부단히 애쓴다 했다. 여기저기서 “그게 바로 꼰대 짓”이라고 퉁을 놓으면서도 공감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3. 마음만은 청춘=그때 아버지 나이가 오십 정도였을 것 같다. 외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주말에만 집에 오는 막내아들과 나란히 누운 당신은 며칠 전 서울에서 겪은 황망한 일을 전했다. 버스를 탔는데 젊은 아가씨가 “할아버지 여기 앉으세요”라며 일어서더란다. 그러면서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아직 너처럼 이팔청춘인데 말이야”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당시엔 우스갯소리로 웃어 넘겼다. 하지만 나 자신이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돼가다 보니 당신이 그 말을 꺼낸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하루가 다른 요즘이지만 마음만은 20대 막바지 다짐처럼 ‘친구 같은 아빠’ ‘실력 있는 선배(후배)’ ‘늘 깨어있는 기자’로 통하고 싶다.

#4. 이제야 낮 12시=동아리모임 다음날 숙취로 몸은 부대끼는데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모두들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은 아닌 것 같다. 문득 대학 시절의 패기와 열정을 떠올렸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다. “일이 많아”, “나이가 몇 개인데”, “요즘 너무 힘들다”면서 나 자신의 무딤과 타성과 게으름을 감추려 했던 것은 아닌지 싶다.

한국인의 기대수명이 82.4세라고 한다. 하루로 따지면 이제 겨우 낮 12시다. 말 그대로 ‘생애전환기’다. 앞날이 창창하다. ‘마음은 청춘’이라고 위안만 할 게 아니라 앞으로 열혈청년의 마음가짐으로 즐겁게, 열심히 살자고 다짐을 해본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시대, 물론 그 출발점은 일의 성취와 삶의 행복일 것이다.

송민섭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