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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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디지털 혁신의 빛과 그림자

“고객님이 처음 오셔서 불편하신 거예요, 그래도 익숙해지면 오히려 편해지는 날이 올 겁니다.”

최근 상품 가입을 위해 은행을 들렀다가 은행 직원에게서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스마트폰과 사투를 벌이며 진땀을 빼고 있는 나를 격려해준 말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최근 급한 업무를 끝내고 짬이 나 은행을 들렀는데 창구가 완전히 막혀 있었다. 직원은 “지점이 최근 디지털 특화 점포로 바뀌어 5명 남짓한 직원들은 고객들이 직접 스마트폰과 PC로 은행업무를 볼 수 있도록 곁에서 안내원 역할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에 은행 앱을 설치한 후 각종 정보를 직접 입력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입력하는 도중에 엉뚱한 곳을 클릭했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급한 마음에 직원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객이 반드시 직접 모바일로 계좌 개설과 상품 가입을 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디지털 점포라 빠르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편한 것 같다“는 불만을 토로 하자, 직원은 “앞으로 모든 매장이 점차 디지털 점포로 바뀔 것이다. 당장 번거롭더라도 익숙해지면 편한 날이 올 것”이라고 격려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필자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고객이 많았다. 어르신 고객들은 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였다. PC 앞에서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고전하고 있었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

‘디지털 혁신’이 시대의 유행어가 된 지 오래다. 개인적으로도 은행들의 디지털 행보를 취재하면서 최근 급증하고 있는 은행의 무인점포와 발달하는 모바일 앱 기능 등을 여러 번 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디지털 혁신이 생경하고 부담스러웠다. 모든 정보를 자신의 스마트폰에 직접 입력해야 하는 일이 편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있으면 은행 직원들이 내 업무를 말끔히 처리해주던 시절의 관성에 젖어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디지털 점포를 처음 접하거나 원래가 기계치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객이 처한 상황이나 성향, 필요한 서비스가 제각각인데 ‘디지털 온리(Only)’만을 강요한다면 필자 같은 사람은 내심 반항심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함을 감수한 채 인터넷뱅킹조차 이용하지 않는 부모님의 ‘디지털 저항’도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비대면으로 상품을 가입할 때 수많은 금리 혜택과 환율 우대 등이 있다”고 말해도 부모님은 오히려 “인터넷뱅킹을 하다 자칫 해킹당할 위험이 크다. 스마트폰은 더 위험하다. 너도 절대 하지 마라”는 응수를 하곤 했다. 비대면 서비스의 장점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새로운 것은 귀찮은 것’, ‘익숙한 것은 안전하고 편한 것’이라는 견고한 믿음이 비대면 상품의 금리 혜택 등을 사소한 이득으로 치부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돈과 관련된 것만큼은 사람 얼굴을 보고 처리해야 왠지 마음이 놓인다”고 말하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다. “은행 방문하는 것보다 모바일로 설명서 읽는 게 더 귀찮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많다.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금융권의 디지털 혁신이 가속화하면 할수록 다른 한편에선 디지털 소외계층의 불편함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디지털 혁신의 빛과 그림자다. 운용의 묘를 살려나가야 할 때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