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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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전쟁의 역설적 수혜

전쟁이 살상용 무기를 양산하고 살육 흔적만 남기는 게 아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경쟁 끝에 유용한 기술적 진보를 이루기도 한다.

통조림은 나폴레옹 1세가 장거리 원정에 나서는 프랑스 군대에 신선한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공모전을 한 결과 당선된 수상작이었다. 1810년 한 제과업자가 유리병에 음식을 넣고 열을 가한 뒤 밀봉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10년 뒤 영국인이 주석깡통으로 대체하면서 진보를 거듭했다. 버터 대용품인 마가린은 나폴레옹 3세가 군인들에게 제공할 버터 대용품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포상하겠다면서 지시해 만들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중화됐다.

지퍼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미 육군이었다. 군화의 탈착이 편하도록 신발끈 대용으로 개발됐는데 군인들이 지퍼를 옷에 붙였다. 빨간색 외장에 스위스의 십자가가 박혀 있는 빅토리녹스 만능칼도 군인 보급품이었다.1886년 스위스 군인들에게 보급된 나무손잡이 주머니칼에 드라이버, 병따개 등을 붙여 기능을 향상했다.

요즘 전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접이식 자전거도 전쟁의 산물이다. 2차대전 때 공수부대용으로 납품된 영국 군용물자였다. 영 국방성의 요구는 “공수부대원이 등에 지고 낙하할 수 있는 가벼운 접이식 자전거에 최소 80㎞를 주행할 수 있도록 할 것”이었다고 한다. 1회용 생리대도 전쟁의 부산물이다. 부상병을 치료하던 간호원들이 면생리대를 빨아서 병동 뒤에 널어 말렸는데 부상병들을 자극한다는 지적에 따라 킴벌리 클라크가 1회용을 개발했다. 등산용 식품으로 인기 있는 간편식은 미군 납품용 C레이션에서 시작했다. 미국 코카콜라사가 판권을 갖고 있는 환타는 원래 나치 독일하에서 개발돼 독일군에 보급됐던 음료수였다. 요즘 신산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초소형 무인기(드론)는 아프간 전쟁에서 실용성이 입증됐다. 영국군이 처음으로 길이 10㎝, 무게 16g인 드론을 아프가니스탄에 정찰용으로 투입했던 것.

6·25전쟁은 무엇을 남겼을까. 논의가 한창인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전쟁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생활에 기여한 기술적 진보가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이유일까.

한용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