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설왕설래] 편의점 상비약

몇 년 전 밤늦게 갑자기 치통이 와서 크게 고생했다. 머리끝까지 통증이 올라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진통제를 찾았지만 집에 비치한 게 없었다. 동네에 문을 연 약국도 없었다. 결국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 진통주사를 맞고서야 통증이 멎었다. 당시 혼난 경험은 편의점에서 다양한 상비약을 팔아야 한다는 견해에 동조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야간이나 공휴일에 약국이 문을 닫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시민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2012년 말부터 감기약과 소화제, 해열진통제, 파스 등 상비약 13개 품목을 편의점에서 판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9명이 편의점 상비약 판매 확대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민들은 환자가 가벼운 증상에는 스스로 대처할 수 있게 겔포스 같은 제산제와 지사제, 화상연고 등을 추가해 달라고 요구한다. 미국은 슈퍼마켓, 주유소에서 수만종의 약을 판다. 영국·독일은 물론 일본도 소매점에서 취급하는 약의 범위를 늘리고 있다.

대한약사회는 의약품 오·남용 및 부작용 우려를 내세워 반대한다. 엊그제 폭염 속에서 약사회원들은 ‘편의점 약 OUT’ 피켓을 들고 궐기대회를 했다. 지난해 말엔 약사회 간부가 회의장에서 자해 소동도 벌였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2016년 의약품 오·남용 사례 22만8939건 중 안전상비약과 관련된 부작용은 0.1%에 그쳤다. 약사들의 속내는 시중에서 잘 팔리는 약을 편의점에 뺏겨 매출이 감소될까 우려하는 것 아닌가. 국민 건강을 구실로 ‘밥그릇 지키기’ 한다는 눈총을 사는 이유다.

보건복지부는 어제 편의점 상비약 지정심의위원회 6차 회의를 열었지만 제산제와 지사제 등 품목 추가에 실패했다. 당초 복지부는 1년 반 가까이 끌어온 품목 조정을 이날 끝낼 방침이라고 했다. 그러나 약사회는 되레 편의점에서 팔던 타이레놀을 제외시켜 달라며 강력 반발했단다. 약사들의 ‘집단 이기주의’ 고질병을 고칠 약은 없을까. 대다수 국민이 원하는 걸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 행정이 답답하다. 시장의 물길은 소비자가 원하는 쪽으로 나는 법인데….

채희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