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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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다문화 아이들 권투로 심신단련… 자신감 높아지죠”

2013년 KBF 페더급 챔피언 출신/ 망막박리 부상으로 선수 삶 정리/ 매주 일요일 청소년 15명 지도/ 아이들 가르치며 ‘제2 권투인생’/“링 위에 서면 주인공은 나 자신/ 정서 발달 도움… 자존감도 UP”
한국권투연맹(KBF) 페더급 챔피언 출신의 법무부 공무원인 석봉준씨가 지난 8일 서울 양천구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사무실에서 한국인·다문화가정 자녀들에게 권투를 가르치게 된 이유 등을 소개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법무부 주무관 석봉준(33)씨는 평범한 공무원이다. 현재 서울출입국·외국인청 총무과에서 기획·홍보 업무를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2013년 한국권투연맹(KBF) 페더급(57㎏) 챔피언 출신이다. 한때 프로 권투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석씨는 공무원에서 권투 선수로 변신한다. 그가 글러브를 끼는 것은 누군가와 겨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한국인·다문화 가정의 어린이·청소년들을 상대로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서울외국인청 사회통합협의회 주최로 경기도 과천시 대한권투체육관에서 진행 중인 ‘여름나기 권투 교실’이 그의 무대다. 초·중·고등학생 15명이 매주 일요일 2시간 동안 석씨에게 권투를 배운다. 절반 정도는 중국, 필리핀 등에서 온 결혼이민자 가정의 자녀들이다.

“3분 운동하고 30초 쉬는 식으로 2시간 내내 운동만 합니다. 아이들이 자기 절제 측면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서로 펀치를 날리며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풀 수 있고요.”

지난 8일 만난 석씨는 “권투가 체력 단련뿐 아니라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달콤한 휴일도 반납하고 재능 기부에 나선 이유다.

석씨는 2010년 취미로 권투를 시작했다가 주변 권유로 선수로 나섰다. 2012년 한국권투위원회(KBC)의 37회 전국 신인왕전에서 준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듬해 KBF 페더급 챔피언에 올랐다. 고교 시절 무에타이를 배워 이종격투기 대회에 나갔을 정도로 석씨의 운동 신경은 수준급이다.

“챔피언 결정전 준비 때 법무부 본부에 근무했는데 당시 업무량이 적지 않았습니다. 프로 권투 선수의 겸직 허가를 어렵게 받아냈죠. 오전 6시에 일어나면 수영과 달리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오후 9시쯤 퇴근해 자정까지 연습만 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한 달 좀 넘게 했던 것 같아요.”

정부과천청사와 가까운 과천 대한권투체육관이 그의 훈련 장소였다. 이 인연으로 체육관 측은 권투 교실에 공간을 무료로 대관해 주고 있다. 석씨의 후배 4명도 봉사를 자청해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석씨는 2015년 어쩔 수 없이 링을 떠나야 했다. 오른쪽 눈의 망막이 충격을 받아 떨어져나가는 망막박리란 부상 때문이었다.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오른쪽 눈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록 본인의 꿈은 접었지만 지금은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제2의 권투 인생에 푹 빠져 있다.

“아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의욕을 보이면서 잘 따라와 주고 있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권투 교실에 나온 친구도 있죠. 실력이나 체구를 보고 매번 짝을 지어 주는데 편견 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아이들이 다 같이 힘들게 운동하다 보니 동지애가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이민자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는 계기도 되지 않을까요.”

석씨는 이번 권투 교실이 끝난 뒤에도 운동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을 적극 지원할 생각이다. 출석률이 높은 학생에게 권투 연습을 더 할 수 있도록 체육관 이용권을 주는 등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링 위에 서 본다는 건 인생에서 큰 경험이고 자산입니다.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높이는 데 굉장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링 위에 오른 그 순간, 세상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죠.”

박진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