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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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지금] 31년 만에 저무는 ‘헤이세이 시대’… 연호 변경 ‘뜨거운 감자’

나루히토 왕세자 즉위 앞둔 日
“처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것은 2012년….”

지난해 9월 일본 왕실의 마코(眞子·26) 공주가 혼인 내정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보고 일본 보수층은 큰 충격을 받았다. 평민 출신 회사원과의 결혼 때문이 아니다. 일본 왕족이 기자회견에서 시종일관 일왕제(천황제)의 상징인 원호(元號)를 사용하지 않고 서력(西曆)만 사용한 탓이다.

원호와 서력은 우리말로 각각 연호(年號)와 서기(西紀)를 의미한다. 마코 공주는 아키히토(明仁) 현 일왕의 둘째 아들인 후미히토(文仁) 왕자의 장녀다. 일왕의 손녀이자 내년에 즉위하는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의 조카인 것이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아들이 없어 유고 시 마코 공주의 아버지(후미히토 왕자)나 남동생(히사히토 왕손)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 이런 위치의 인물이 현 일왕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를 사용하지 않고 서기로만 발언했다는 점을 보수층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보수 논객인 가지 노부유키(加地伸行) 오사카대 명예교수는 월간지에 공개적으로 “쇼크를 받았다”고 썼다.

◆신일왕 즉위 앞두고 연호 변경 화두

연호에 대한 국민 저변의 인식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내년 5월1일 나루히토 왕세자의 국왕 즉위를 앞두고 개원(改元·연호 변경) 문제가 일본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일본은 연호제를 유지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다. 우리나라는 5·16 군사정변 후 1962년 1월1일부터 단기(檀紀) 대신에 서기를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는 김일성 주석의 출생연도인 1912년을 ‘주체 1년’으로, 대만에는 중화민국이 선포된 1912년을 ‘민국(民國) 1’년으로 산정하는 연도 표기법이 있다. 단기, 주체, 민국 모두 서기와는 다른 독자적인 연도 표기법이나 군주에 따라 호칭이 바뀌는 연호와는 차이가 있다.

기원전 140년 중국의 한(漢) 무제(武帝)가 사용한 건원(建元)이 시초인 연호는 동아시아 군주제 나라에서 국가의 통일과 세계관의 중심을 상징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다. 명·청 왕조의 연호를 사용하던 조선은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 황제가 개국(開國)·건양(建陽)·광무(光武), 순종 황제가 융희(隆熙)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제36대 고토쿠(孝德) 왕이 즉위한 서기 645년 시작된 다이카(大化)가 최초로, 현재의 헤이세이는 247번째 연호다. 중국에서처럼 과거 일본에서는 일왕 한 명이 수개의 연호를 쓰기도 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재앙이 있을 경우 연호를 바꾸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래 메이지-다이쇼(大正)-쇼와(昭和)-헤이세이처럼 한 명의 군주가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이 정착됐다.

현재 연호와 관련된 논의의 초점은 248번째 연호의 호칭과 발표 시기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지난 1월 새로운 연호에 대해 “신(新)연호는 일본인 생활에 깊게 뿌리 박힌 것으로 (할 예정)”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인터넷상에서는 잔업(殘業), 스시(壽司)로 하면 되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연호는 누가 정하는가. 최초의 다이카부터 쇼와까지 246개 연호는 일왕 스스로 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전(戰前)의 일본제국헌법(메이지헌법)은 연호를 칙정(勅定·일왕의 결정)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전후 상황이 바뀌었다. 일본 정부는 새로운 헌법 시행에 따라 1946년 연호제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연호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구국왕제 부활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한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히로히토(裕仁·쇼와) 일왕의 즉위 50주년을 맞은 1976년부터 연호법 제정 움직임이 다시 전개돼 1979년 입법에 성공했다.

연호법(일본명 원호법)은 “연호는 정령(政令)으로 결정한다”고 돼 있다. 정령은 쉽게 말해 내각에 의한 명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내각 각료회의(국무회의)를 거쳐 연호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국왕이 정하던 연호를 이제 총리가 결정하게 된 것이다. 1989년 히로히토 일왕 사망 후 발표된 헤이세이라는 연호는 일왕이 아닌 일본 내각이 결정한 첫 연호였던 셈이다. 일본 정부는 새로운 연호 제정을 위해 학자, 전문가 그룹의 의견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 연호 발표 시점 논란도

현재 일본에서는 새 연호의 명칭만큼 주목받는 게 발표 시점이다. 현 아키히토 일왕은 내년 4월30일 퇴위하고 다음 날(5월1일) 나루히토 왕세자가 즉위한다. 원래 새로운 연호는 일왕이 사망한 뒤 차기 일왕이 즉위할 때 발표되는 것이 순서다. 일왕의 생전 퇴위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면서 연호 변경 시점도 민감한 문제가 되고 있다.

정보기술(IT) 시대인 현시점은 쇼와→ 헤이세이로 변경됐던 1989년 이전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를 제기한다. 새로운 연호가 결정돼야 행정기관, 기업, 학교 등에서 그것에 맞게 전산시스템을 변경한 뒤 5월1일부터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호 변경과 관련해 일각에서 밀레니엄 버그(컴퓨터가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결함)를 우려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전산시스템 준비 등을 위해 적어도 5월1일 한 달 전인 4월1일 이전 새 연호 발표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자 보수층이 발끈하고 나섰다. 현 일왕 재임 중에 새로운 연호가 발표되면 ‘권위의 이중화’가 예상된다며 5월1일 이후 발표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후루야 게이지(古屋圭司) 중의원 운영위원장 등 자민당 내 강경 보수 의원들은 지난 6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을 만나 신연호를 신일왕 즉위 이후로 연기할 것을 요청했다. 앞서 초당파 보수 의원 모임인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나 일본 전국 신사(神社)를 총괄하는 신사본청도 같은 의견을 주장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런 대립에 대해 “사상 최초인 연호의 사전 공표를 둘러싼 공방은 ‘연호는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도쿄=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