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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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의세상보기] 폭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온난화가 야기한 글로벌한 ‘人災’ / 재난 규정할 만큼 위험요소 많아 / 정부 조치 전기료 인하 미봉책 그쳐 / 환경·산업 등 중·장기 대책 세워야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추(立秋)가 지났건만 폭염의 기세는 여전하다. “살다 살다 이런 더위는 처음”이라는 어르신들 푸념을 올여름엔 유독 자주 들었다. “폭염경보가 발효 중이니 야외 활동을 자제하고 물을 자주 섭취하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 지도 어느 새 보름은 훌쩍 넘긴 것 같다.

 

현대사회의 특성을 위험사회로 규정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의 주장은 폭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방식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베크에 따르면 사회는 항상 위험에 직면해온 것이 사실이나, 오늘날의 위험은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무엇보다 오늘날의 위험은 ‘불가시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 베크의 주장이다. 몇 해 전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도 그러했고, 지독한 폭염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도 눈으로 확인 가능한 현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현대사회의 위험이 글로벌한 특징을 갖고 있음도 주목을 요한다. 중국 변방에서 발생한 조류인플루엔자가 전 세계를 무대로 사람과 물류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글로벌리제이션의 흐름을 타고 글로벌하게 확산됐음은 좋은 예다. 동일본대지진의 여파만 해도 일본 사회를 뛰어넘어 특별히 유럽의 경기 침체에 직격탄을 날렸음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전 세계가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 한반도에서도 폭염이 기승을 부렸음은 위험의 글로벌화 현상을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오늘날의 위험이 ‘제조된 위험’의 특성을 보인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폭염 역시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적 성격 못지않게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인재(人災)의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험의 원인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과정이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 영역에 포섭돼,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는 불안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폭염의 원인이 지구 온난화라고는 하지만 지구 온난화가 어떤 기제로 진행되는지, 지구 온난화의 구체적 영향은 무엇인지, 지구 온난화로 인한 폭염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등을 둘러싼 지식은 기후나 기상 전문가들의 고유한 영역에 속한다. 전문가 사이에도 항상 의견의 합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사안을 놓고 상반된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할 경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현대사회 위험의 속성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폭염 앞에서 한국사회가 이에 대응하는 방식이 여전히 전통적 위험을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은 진정 유감이다. 폭염으로 인해 전기 사용량이 폭증함에 따라 전기요금 누진제를 일시적으로 완화하겠다는 정부의 조치는 시민의 일상적 애환을 세심하게 배려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단은 환영한다. 하지만 이 정도 조치는 대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앞에 놓고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는 수준에 머무는 건 아닌지 우려가 앞선다.

 

폭염을 재난으로 규정하는 상황이라면 단기적이고 일시적인 대책을 넘어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고 불만을 감소시켜줄 중·장기 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얼마 전 한반도의 기상 변화와 관련해서 향후 여름이 150일까지 연장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바 있다. 여름의 장기화가 1차 산업인 농림수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서부터, 우리의 의식주를 위시한 기본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대비와 치밀한 준비가 필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 수급정책 또한 국민의 첨예한 관심사임이 분명하다. 탈원전 정책을 대상으로 국민 공론화 과정을 거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너지 이슈가 다시금 전면 부상한 상황에서, 정부가 탈원전을 계속 고수할 것인지 여부는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까지 안고 있다 하겠다. 더더욱 환경오염이 폭염의 원인인 만큼 국민의 환경 인식 개선에서부터 환경보호 실천을 거쳐 환경 교육에 이르기까지 정부 차원의 정책 개발과 시민사회 차원의 자발적 운동이 활발히 전개돼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폭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전근대적 범주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농사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하늘이 도와주어야지”, “폭염은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경고야”, “이 폭염도 지나갈 것이니 인내심을 발휘하자”는 수준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4차 산업혁명 시대,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을 기반으로 폭염의 원인을 보다 정확히 분석하고 폭염으로 인한 재난 상황에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동시에 폭염이 가져올 변화에 적극 대처하자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거의 들리지 않는다.

 

요즘 농촌에서는 폭염에 가뭄까지 겹치면서 쩍쩍 갈라진 논밭에 물대기가 한창이다. 가뭄이 극심한 지역에서는 산불 진압용 차량까지 동원해서 부족한 물을 공급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지만, 위험에 대처하는 우리의 방식은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지 못해 매해 동일한 유형의 위험을 반복함으로써 위험사회를 넘어 ‘초위험사회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내년에도 올해와 같은 수준의 폭염이 반복될지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전기료 인하 이외에 별 뾰족한 정책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니, 이 더위가 더욱 고역으로 다가옴은 나만의 투정은 아닐 것 같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