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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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법원·검찰 갈등 피해는 국민 몫

서울 서초구 법원 청사 1층 민원실 앞은 늘 북적인다. 여든을 훌쩍 넘긴 듯 피부가 자글자글한 노인부터 빛 바랜 누런 점퍼를 입은 중년 아저씨까지 법원을 찾은 이들은 서류 꾸러미를 한가득 안고 있다. “왜 내 말을 안 들어주느냐”는 고성도 심심찮게 들린다. 최악의 폭염에 ‘서프리카’(서울+아프리카)란 신조어가 등장한 날 노란 옷을 입은 여자아기가 법원 민원실에 왔다. 아직 돌도 안 지난 듯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지친 표정으로 서류를 작성했다. 한 대형마트 브랜드가 새겨진 노란 장바구니 안에는 기저귀로 추정되는 물건이 담겨 있었다.

이후에도 그 아기와 엄마를 법원에서 한두 차례 더 마주쳤다. 기자 눈에 유독 모녀가 밟힌 건 그 수고스러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며칠 전 200일을 갓 넘긴 아들을 데리고 집 앞 10분 거리 백화점에 갔다. 분유와 온수, 젖병을 챙겼다. 낯가림이 심한 아기의 시선을 끌 장난감과 인형도 잊지 않았다. 기저귀와 물티슈도 가방에 넣었다. 사람이 북적이는 백화점에서 아기가 언제 울지 몰라 긴장됐다. ‘폭염에 일사병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걱정했다가 실내에 들어가면 이번엔 ‘에어컨 바람에 감기 걸리는 건 아닌가’ 하고 불안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왔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염유섭 사회부 기자

수고를 감수하고 갓난아기를 안은 채 법원을 찾은 엄마를 보면 새삼 법원이 갖는 의미가 무겁게 느껴진다. 어디 이들뿐이랴. 여든을 넘긴 백발노인, 소매가 터진 점퍼를 입은 중년 남성 등이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법원 민원실 주변을 서성거린다. 돈도, 권력도 없다 보니 그저 법원을 통해 자기한테 피해를 준 상대방에게 벌을 주는 방법밖에 없다. 법원 청사에 쩌렁쩌렁 울리는 어느 할머니의 고성엔 이곳마저 나를 외면하면 더는 억울함을 풀어줄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당장 KTX 여승무원 해고 등 기존 법원 판결을 못 믿겠다며 재심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검찰도 진상규명에 나섰다. 그런데 위기에 빠진 법원과 이를 수사하는 검찰을 보고 있노라면 더 답답해진다.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검찰 압수수색영장을 잇달아 기각하며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하다. 검찰은 영장 청구와 기각 등 수사 상황을 낱낱이 언론에 공개하고 현직 판사를 공개 소환해 포토라인 앞에 세우는 등 ‘망신 주기’에 재미가 들린 모습이다.

법원과 검찰의 힘겨루기가 장기화할수록 힘없는 서민들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 신뢰도는 뚝뚝 떨어진다. 그들이 기댈 단 하나 남은 벽마저 쩍쩍 갈라져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권력기관들의 갈등과 충돌 끝에 결국 피해를 보는 건 대다수 평범한 국민이다. 법원과 검찰 둘 다 자존심 싸움보다 ‘진실을 신속히 밝히겠다’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검찰은 수사 상황의 실시간 중계를 자제해야 한다. 법원도 수사에 최대한 협조함으로써 잘못한 것은 바로잡고 오해는 풀어 진실을 낱낱이 밝히길 바란다.

염유섭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