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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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3돌 특별기획] 독립운동 내용 없이 이름만 덩그러니…최봉설 의사를 아십니까

군자금 마련 위해 일제 은행 탈취… 中 동북지방 뒤흔들어 / 독립운동가 최봉설 삶과 자취 / 1920년 ‘15만원 사건’ 주역 / 中 연길서 태어나 독립운동 투신 / 철광단 활동… 日현금수송차 덮쳐 / 대담하면서 효과적인 전술 평가 / 1937년 혹독했던 소련 생활 / 러 혁명 큰 공 세우고도 강제이주 / 마땅한 거처 없어 땅굴서 첫 겨울 / 우리말도 금지 ‘망국의 한’ 사무쳐 / 아픈 역사 증명하는 카자흐 묘역 / 1973년 숨져… 침켄트시 묘지 안장 / 묘비엔 독립운동 내용 없이 이름만 / 유족 뜻 따라 유해 봉환 않고 남겨
1920년 1월 17일, 독립신문이 중국에서 발생한 사건을 보도했다.

“본월 4일… 한인 10여 명이 총기를 가지고… (현금을 수송하던 일본인들을) 포위공격하여 왜 순경 1명을 사살하고 우편 행리 4개 외 현금 전부를 탈취하였다.”

훗날 이 사건은 ‘15만원 탈취사건’으로 기록된다. 1990년 6월 30일, 중국 길림성 용정시 하승지촌에 세워진 기념비의 내용은 이렇다. 

“… 임국정 등은 군자금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서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용정출장소로 보내는 15만원(지금의 75억원 가량)을 성공적으로 탈취하였다.”

15만원 사건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군자금 모금활동”이었다. 최봉설(1897∼1976, 다른 이름 ‘최계립’) 의사는 15만원 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중국 연길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5만원 사건 이후 러시아로 이주한 뒤 1930년대 강제이주를 당했다. 그의 인생역정을 증언하는 중국, 카자흐스탄의 사적지를 따라가다 보면 독립투사들의 기개와 대담함에 감탄하는 한편 나라를 잃은 이들의 고초에 사무치게 된다. 

◆조선민족의 정의로 군자금을 탈취하다

최봉설은 길림성 연길시 와룡촌에서 가난한 농민 최문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부터 8년간 민족학교 ‘창동학교’를 다녔고 1919년 3·1운동 후 대한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청년회에 참여했다. 최봉설이 같이 15만원 사건을 이끈 임국정·윤준희·한상호·김준·박웅세가 속한 ‘철혈광복단’(철광단)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무장투쟁을 주장한 철광단은 단원 수가 2만 여명에 달했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여서 상당한 규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조직된 어떤 독립운동단체든 자금모집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일 수밖에 없었는데, 철광단은 일제의 은행을 노리는 과감함을 보였다. 이 사건이 “일제의 금융기관을 직접 공격대상으로 삼아 군자금 획득 계획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대담하면서도 효과적인 전술적 시도”로 평가되는 이유다. 거사 대상이 된 조선은행 용정촌 출장소는 일제가 러시아 세력의 확대를 방지하고 동만주 지역에 본격 진출하기 위해 세운 금융거점이었다.

사관학교 설립, 무기 구입과 군대 편성 등을 도모할 정도의 큰 돈을 탈취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 돈을 계획대로 쓸 수는 없었다. 사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1월 30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봉설을 제외한 사건 주역들이 체포됐고, 돈도 대부분 뺏겼기 때문이다. 윤준희·임국정·한상호는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돼 재판에 회부돼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21년 8월 25일 순국했다. 재판 과정에서 윤준희 등은 무죄를 주장하며 꼿꼿한 독립운동가의 기개를 보였다.

“우리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한 의사의 활동이며, 1심과 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이 부당하여 복종하기 불가능하므로 상고한다.”

◆땅굴에서 맞은 혹독한 겨울, 나라 잃은 설움

일제의 체포를 간신히 피한 최봉설은 러시아로 이주해 ‘러시아 혁명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고초를 겪게 됐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수석연구위원은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1930년대 초반에 시작된 스탈린 탄압의 첫 희생자였다”며 “반혁명분자, 일본 간첩과의 협력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어야 했고, 소련에 거주한 한인 전부는 강제이주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된 최봉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한인강제이주 후 첫 겨울을 지낸 땅굴’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땅굴은 1937년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한국인들이 첫 겨울을 보내며 지냈던 곳이다. 이처럼 제대로 된 거주지조차 마련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 제한, 한국어 교습 금지, 한글 서적의 소각·폐기, 정치 참여 금지 등의 차별까지 감내해야 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강제 이주 피해자였다. 홍범도는 크즐오르다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를 하며 살다 1943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범도 묘역’은 동포들의 성금으로 1951년 조성됐다. 흉상에다 3개의 기념비를 갖춘 지금의 형태로 정비된 것은 1996년 5월이었다.

1973년 1월 세상을 떠난 최봉설은 부인 김신희 여사가 잠들어 있는 침켄트시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그의 유해를 봉환하고자 했으나 부인과 어머니의 묘만 남겨지는 것을 원치 않는 유족의 뜻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독립기념관은 ‘최봉설 묘’를 소개한 글에서 “묘비에 최봉설의 독립운동 관련 내용이 없어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