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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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자가 아닌 것 같아"…남성 불임 환자들의 고통

“마치 내가 남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영국 런던에서 TV 프로그램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글렌 바덴(48)은 30대 때 아이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자 수에 문제가 없었고, 술·담배를 피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지켰지만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번번이 아이를 가지는 데 실패했다. 그는 “검사 결과를 통보받으러 의사를 찾아갔을 때 남성성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결국 그도, 아내도 신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뒤 그는 초조함, 실망감과 더불어 분노가 찾아왔다고 덧붙였다.

영국 가디언은 바덴의 사례처럼 남성 불임(난임)이 늘면서 많은 남성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자 수 40년간 절반으로 감소…증가하는 남성 불임

남성 불임은 각종 통계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지난해 이스라엘 헤브루대학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서양 남성의 정자 수는 지난 40여년간 절반가량 감소했다. 정자 수의 변화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현재 남성 5명 중 1명이 적은 정자를 갖고 있고, 2명 중 1명은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계보건당국 기준을 보면 1밀리리터당 정자 수가 4000만개보다 적으면 임신 확률이 떨어지고, 1500만개보다 적은 경우 임신이 힘든 ‘핍정자증’으로 분류된다. 프랑스에서 실시된 한 연구에 따르면 건강한 정자가 매년 2% 정도 감소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리차드 샤프 에든버러대 교수는 “‘위기’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남성 불임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자 수가 추세적으로 감소하고 있지만 원인은 불분명하다. 비만, 흡연, 스트레스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이론이 있는가하면 일각에서는 피임약 등이 식수에 침투해 정자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영국 셰필드의 남성학과 앨런 퍼시 교수는 “부모들의 나이가 많아진 것도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며 “나이가 많은 남자와 여자가 만난다는 것은 임신 성공확률을 줄이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헤브루 대학의 연구 결과에서 발틱해 동쪽에 사는 남성들이 평균적으로 정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환경이 남성 정자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외되는 남성 불임

가디언에 따르면 불임의 절반 정도는 남성이 원인이지만, 여성이 문제라는 대중적인 시선이 여전히 많고 치료도 여성에게 집중되고 있다. 여성의 경우 산부인과에서 임신과 관련한 치료를 받지만 남성의 생식 기능 개선을 위한 진료 센터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주로 남성 정자 수와 상태만 검사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런던에서 남성 생식개선 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셰릴 호마 박사는 “많은 남자들이 필요한 검사를 받지 않은 채 체외수정을 시도한다”며 “남성 불임의 가장 큰 원인은 정계정맥류”라고 말했다. 정계정맥류는 음낭의 고환에서 나오는 정맥혈관이 확장돼 엉키고 부푸는 것으로, 불임 남성의 40%가 갖고 있는 질환이다. 임신에 성공한 남성의 15%도 이 질환을 갖고 있다.

호마 박사는 초음파를 통해 간단히 정계정맥류를 발견하고 치료할 수 있지만 남성 불임 검사는 정자 상태 확인에만 그치고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자 수나 활동성을 검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검사들은 제한적인 정보만 줄 뿐”이라며 “체내에 활성산소가 얼마나 있는지, DNA 분절 검사 등을 추가적인 검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샤프 교수도 “정액을 검사하는 것은 완벽하지 않은 방법”이라며 “정자 수가 많은 사실이 임신을 보장하지 않고, 정자 수가 적더라도 불임인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심리적인 고통 겪고 있는 불임 남성들

자연적인 임신이 힘든 것으로 판명될 경우 시험관 등 체외수정을 통해 임신을 시도하게 된다. 이때 주로 여성을 중심으로 임신 과정이 진행되지만, 이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과정에서 남성도 큰 심리적 타격을 겪는다. 바덴은 “(병원에서) 내가 했던 건 그저 작은 통에 사정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30대 내내 주기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며 “아이가 있는 친구들과 함께 있기가 어려웠고 임신과 관련한 주제가 나오면 피했다”고 말했다. 가레스 다운은 21살 때 자신이 무정자증인 사실을 알게 된 당시를 악몽처럼 떠올렸다. 그는 “직장에서 일하던 중에 의사한테서 전화가 와서 ‘당신에게 정자가 없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는데 고작 5분 통화가 전부였다”며 “병원으로 와서 대화를 하자는 제안도 없었고, 왜 그런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다운은 체외수정 등 보조생식술을 시행한 뒤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고통스러웠다고 설명했다.

다운은 불임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임이 모두 여성이 회원으로 구성된 상황에서 남성들만의 고민을 공유하기 위해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스북에 ‘남성들의 생식 지원’이라는 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불임이란 문제를 감추지 말고 각자가 겪고 있는 상황을 공유하자는 취지다. 다운은 “서로 얘기를 하면서 다들 위로를 받고 나아졌다”고 말했다. 호마 박사는 “남성 불임을 부차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생각한다면 훌륭한 작품의 절반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가디언은 남성 불임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고 있는 문제라며 “남성 불임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달라져야 하고 불임을 겪는 남성을 지원하는 의료계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