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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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역고소 방어의 시대가 왔다"…안희정 1심 무죄 파장은?

법원 판단 배경은 / “김지은, 핵심 증거 텔레그램 대화 삭제 등 의문점 많아” / 金, 安 운전비서 성희롱 땐 직접 항의 / “性的 자기결정권 없던 것으로 안 보여… 金, 씻고 오라는 安 前지사 말에 응해” / 운전비서 다른 숙소 묵게 한 점도 고려 / 김씨측 “최근 판례 흐름에 뒤처져” 비판 / 법조계선 무고죄 성립 여부 놓고 이견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는 과정에서 법원은 전직 비서 김지은(사진)씨의 진술 대부분에 의구심을 보였다. 객관적 사실과 맞지 않는 진술이 많고 김씨가 피해자로 보기 어려운 태도를 너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 ‘미투(#MeToo·나도 당했다)’에 나선 정황에 의구심을 이례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미투 운동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사건의 순수성에 1심 법원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김씨, ‘씻고 오라’는 말에 응해”

14일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조병구)에 따르면 김씨는 안 전 지사의 운전비서한테 성희롱을 당했다고 느끼자 친분 있는 지인들과 비서실장에게 이를 털어놓고 직접 해당 운전비서에게 항의까지 한 적이 있다. 김씨가 성적 자기 주체성과 자존감이 강하다고 판단한 근거다. 재판부는 “김씨가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김씨 측 진술 대부분의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7월30일 러시아에서의 첫 성관계에 대해 김씨는 “안 전 지사가 당시 ‘외롭다’며 자신을 안았고 심리적으로 얼어붙어 거절의사를 보이지 못했다”고 했지만 재판부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김씨가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를 하는 식당을 찾아 아침식사를 하려고 애썼고 성관계 당일 저녁 안 전 지사와 함께 와인바를 찾은 사실을 지적했다.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안 전 지사는 이날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상윤 기자
재판부는 “가식의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는 지인에게도 피고인을 지지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며 “단지 간음 피해를 잊고 수행비서 일을 열심히 하려던 것이라는 피해자 주장에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8월13일 서울 강남 한 호텔에서의 두 번째 성관계도 합의에 의한 것일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서 ‘씻고 오라’는 말을 들은 김씨가 시간, 장소, 당시 상황, 과거 간음 상황 등에 비춰 그 의미를 넉넉히 예측할 수 있었을 것임에도 별다른 반문이나 저항 없이 응했다”고 판시했다. 특히 김씨가 그 과정에서 “호텔이 만실”이라며 운전비서에게 거짓말을 해 다른 숙소에서 자도록 한 사실도 판단에 반영됐다.

지난해 9월3일 세 번째 간음, 올해 2월25일 네 번째이자 마지막 간음에서도 ‘위력’은 인정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당시 안 전 지사와 김씨가 주고받은 텔레그램 대화는 고소 등 준비에 들어가는 김씨에게 주요한 증거일 것인데 모두 삭제된 정황 등을 볼 때 김씨 진술에 의문이 가는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26일 차량 안에선 김씨가 스스로 허리띠를 풀어 안 전 지사가 몸을 만지기 쉽게 했다고 재판부는 지적했다.

재판부는 특히 언론 공개와 법적 절차에 깊이 관여한 안 전 지사 수행비서 A씨와 김씨가 올 2월 내내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은 일에 대해선 “그 경위에 대해 의문스러운 점이 상당히 있다”고 지적했다.

◆무고죄 성립 여부는 엇갈려

검찰은 “인적·물적 증거에 의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됨에도 법원은 달리 판단했다”며 “법원 판단은 존중하나 납득하기 어렵다”고 항소 방침을 밝혔다. 김씨 측도 입장문을 배포하고 “약자가 끝까지 살아남아 진실을 밝히는 초석이 될 것”이라며 “성폭력이 일어난 공간에서의 유형력 행사에만 초점을 맞춘 좁은 해석과 판단은 최근 판례의 흐름조차 따라가지 못한 것”이라고 판결을 비판했다.

법조계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은 안 전 지사가 김씨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놓고 반응이 엇갈렸다.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에 근무하는 한 변호사는 “안 전 지사 판결이 나오자 변호사들 사이에서 ‘역고소 방어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서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내는 건 물론 무고 혐의로 충분히 형사고소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재경지검에 근무하는 일선 검사는 “무고죄는 명백하게 죄가 없는 사람을 형사처벌받게 하려고 고소하는 경우 성립한다”면서 “이 사건은 혐의 입증이 덜 돼 무죄가 선고된 것인 만큼 곧장 무고죄로 보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고소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여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라고 덧붙였다.

安 지지자·반대자 ‘충돌’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여비서 성폭행 사건 1심 선고공판이 열린 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안 전 지사 지지자들이 들고 있던 현수막을 한 여성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여성계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자 여성계는 “납득하기 어려운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를 촉발한 안 전 지사 사건 재판이 다른 미투 사건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피해자 김지은씨를 지원하는 ‘안희정 성폭행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14일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항소 방침을 밝혔다.

위원회 관계자는 “법원이 성폭력사건의 주요 증거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업무상 위력’의 의미를 매우 엄격하고 좁게 해석했다”며 “피해자가 저항을 할지 말지 몰라 답을 고민하던 상황을 법원이 읽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검찰은 즉각 항소해야 한다”며 “우리의 대응은 항소심, 대법원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지은 씨 변호인단과 여성단체 회원들이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1심 무죄 선고를 규탄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김씨 변호를 맡아 온 정혜선 변호사는 “피해자는 16시간의 검찰 조사 과정에서 일관되게 진술했다”며 “재판부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해 없이 피해자 진술을 너무 쉽게 배척했다”고 주장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저항이 어려운 폭행이나 협박이 없는 경우에도 권력이나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피해를 인정한 대법원 판례의 흐름을 역행했다”며 “피해자가 수백장의 조서로 말해 온 현실에 재판부는 응답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미순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지난 5개월의 여정이 너무나 참담하고 가슴이 아픈 순간”이라며 “재판부는 성폭력사건이 사회적으로 변화한다면서도 정작 그 변화의 시기는 읽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학계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다. 여성주의 활동가 권김현영씨는 “안 전 지사와 김씨는 동원 가능한 자원이 완전히 달랐다”며 “안 전 지사는 가족까지 동원해 자신의 의사표현을 충분히 했고 그 과정에서 김씨는 엄청난 2차 피해를 겪었다”고 꼬집었다.

6·13 지방선거에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신지예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재판부가) 위계에 의한 성폭력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날 서울서부지법 앞에서는 오후 7시부터 여성단체 회원 300여명이 모여 안 전 지사의 무죄 선고를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창수·배민영·권구성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