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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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국회 특활비 폐지 명과 암

최근 한 정당 A의원은 출입기자단과의 점심 약속을 취소했다. 보름 전에 잡혔던 이 약속이 갑자기 깨진 이유는 다름 아닌 특수활동비(특활비) 때문이다. A의원 측은 “국회 특활비 폐지로 인해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취재진과의 만남은 부담스럽다”고 출입기자단에 전했다. 30여명의 출입기자단과 동시에 하는 한 끼 식사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면 티타임을 갖거나 더치페이로 만나자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취재진 사이에서는 ‘A의원이 출입기자와의 한 끼 식사를 특수활동으로 여긴 것이었느냐’, ‘특활비 폐지 여론을 주도한 언론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등의 뼈 있는 농담까지 돌았다. 사실 기자들이 A의원을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밥 못 먹어서’가 아니라 ‘소통 부족’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특활비 폐지를 핑계로 소통의 장이 사라진 것이다.
최형창 정치부 기자

이처럼 특활비 폐지는 국회 안팎에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특활비 폐지 논란이 한창일 때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보실에 있던 과자, 커피도 모두 특활비에서 지출된 것이니 앞으로 비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압박했다. 밥 한 끼, 커피 한 잔이 아쉬워 폐지돼야 할 특활비를 존치해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동안 취재진이 누리던 사소한 편의까지 모두 특활비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이제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모두 국민 주머니에서 나온 혈세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용처도 적지 않고 함부로 쓰는 폐습은 진작 없어져야 했다. 국민들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의 말에 분개했다. 그는 2015년 경남지사 시절 과거 특활비 사용에 대해 “나한테 넘어오면 내 돈 아닌가. 집에 갖다 주는 게 무슨 문제인가”라고 뻔뻔하게 나왔다. 지난달 여당과 제1야당 원내대표는 “특활비 폐지는 어렵고 양성화하겠다”고 말했다가 되레 역풍을 맞았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지난 16일 국회는 외교 활동비와 예비금만 남기고 특활비 대부분을 폐지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가 한층 더 투명해진 건 분명하다. 다만, 특활비 폐지가 ‘금권정치’를 더 가속화하지 않을까 싶은 우려는 있다. 금권정치는 부유한 자들이 자본의 힘으로 권력을 행사해 정치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말한다. 취재를 할수록 정치와 자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특히 지난달 세상을 뜬 정의당 노회찬 의원을 보더라도 정치인에게 돈은 ‘불가근불가원’의 존재다. 청렴을 강조했던 노 의원마저 정치 활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검은돈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의원들은 정치를 하면서 경조사 등에 현금을 써야 할 때가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현 정치자금법상 정치자금 사용은 카드결제만 가능하다. 특활비 폐지 이후 자기 돈 써가면서 활동하는 정치인 쪽에 사람이 더 붙을 가능성도 있다. A의원의 주머니가 두둑했다면 굳이 특활비 핑계를 대지 않았을 것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호감을 얻고 사람을 끌어모으려면 정치인에게 돈은 현실적인 문제다. 이를 노리고 부정한 세력으로부터 검은돈의 유혹이 더 활개 치는 건 아닐지 걱정의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자금을 투명화, 양성화해 가난한 정치인의 숨통을 터주는 방안을 검토해볼 만하다. 다만 금권정치로 흐르지 않도록 보완점도 함께 마련돼야 할 것이다.

최형창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