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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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먹방은 먹방이다

“숏다리는 싱글벙글, 돼지는 꼬끼오.”

키가 작았던 단짝친구와 유난히 덩치가 크고 먹성이 좋아 ‘슈퍼 통돼지’로 불렸던 기자를 놀리기 위해 반 친구들이 지어낸 노래의 한 소절이다. 등하굣길 군것질을 하고 있으면 반 아이들이 몰려와 저 소절을 ‘떼창’하곤 했다. 지금은 귀엽게 느껴지는 노랫말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이 때문에 등교거부까지 일삼았다. 몸매 때문에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는 자각을 어렴풋이나마 하며 5~6학년 때는 끼니까지 거르며 다이어트를 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이었는지 키와 몸무게 모두 그 무렵에 성장을 멈췄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저 노랫말이 불현듯 다시 떠오른 것은 재작년 연말이었다. 잦은 술자리와 저녁 약속 때문이었는지 1년 반 만에 몸무게가 두 자릿수 이상 불어났다. 나이가 들면서 기초대사량이 감소한 데다 체질이 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먹방의 영향 때문인지 ‘많은 양을, 복스럽게 탐닉하는 것’이 큰 미덕으로 여겨지면서 나도 모르게 약속 장소에서 많은 양을, 씩씩하게 먹으려고 한 경향도 일조했다. 어쩌면 체중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털털함’을 과하게 연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먹방 전성시대에 식탐은 추앙받을지언정 이상적인 몸매에 대한 고정관념은 달라진 게 별반 없었다. 급변한 몸매에 대한 지적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뒤에서 보면 알아볼 수가 없겠다”, “여기자가 왜 그렇게 자기관리를 안 하느냐…” 등의 핀잔을 듣자니 ‘초등학교 때의 악몽’이 엄습했다. 상대방의 발언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체중이 증가한 자신을 또다시 탓하며 어느새 포털 사이트에서 ‘살 쉽게 빼는 법’ 등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으면서도,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몸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중적 욕구’를 시장은 놀랍도록 잘 간파하며 팽창하고 있었다. ‘맛있는 다이어트 식품’을 별도 코너로 만들어 놓은 식품매장은 상상 그 이상으로 성업 중이었다. 다이어트 약들의 세계도 무궁무진했다. 식욕을 힘겹게 억제해야 하는 다이어터들에게는 실로 호재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막상 약사나 주변 영양학자들은 안전한 다이어트 약이나 맛있는 다이어트 식품 등에 회의적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 약사는 “대부분의 다이어트 약이 교감신경을 지나치게 흥분시켜 대사를 촉진하는 원리다.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심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지인은 “왜 고기 위주의 식단, 폭식 등 근본적인 식습관은 바꾸려 하지 않고,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화학제품에만 쉽게 의존하냐”는 조언을 했다.

생각해 보면 ‘맛있게 먹는 법’이 아닌 ‘건강하게 먹는 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은 사실이다. 우악스럽게 폭식을 즐기는 먹방 속 ‘푸드 파이터’ 등을 보며 묘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폭식보다 균형 잡힌 미식을 유도하는 먹방이 늘어나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들기도 한다. 더불어 가냘픈 몸매로 몇 인분을 금세 해치우는 아이돌들을 잣대로 많이 먹고도, 동시에 마르기를 자신과 타인에게 기대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먹방은 먹방이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