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유명무실한 ‘줄세우기 금지’

“국회의원, 시·도당위원장, 지역위원장이 공개적이면서 집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반대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더불어민주당 당규 제33조에는 전당대회와 같은 당내 선거에 국회의원과 시·도당, 지역위원장의 금기 행위가 이같이 명시돼 있다. 대의원과 당원들을 관리·감독해야 하는 지역위원장이 선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명시 조항이다. 이른바 ‘줄세우기 금지’ 항목이다.

김달중 정치부 기자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틈새시장을 노리는 이들이 있다. 이번 전대 과정에서 이른바 ‘지지’, ‘반대’라는 표현을 생략한 채 우회적으로 지지를 선언한 사례가 속출했다. 이종걸 의원은 지난달 예비경선(컷오프) 직후 이해찬 후보 지지를 선언했고, 직전 원내대표를 지낸 우원식 의원은 “이 후보의 민생경제 연석회의 구상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또 친문(친문재인) 핵심인 전해철 의원은 “체감할 수 있는 경제 정책을 실현해 국정을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당대표가 선출돼야 한다”며 김진표 후보를 밀었고, 박범계 의원은 ‘칼칼한 리더십’을 강조하며 이 후보를 지지했다. 송영길 후보 측은 전대 도중에 인천시의원들의 지지선언을 인천지역 국회의원들의 지지선언으로 잘못된 보도자료를 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너도나도 줄세우기를 한 모양새다.

물론 이 같은 당규에 대한 불만도 있다. 한 초선 의원은 “(당규 의미가) 캠프에서 직을 맡거나 공개적으로 지지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지 개인 의사표명까지 막아야 하겠냐”고 지적했다. 개인의 정치활동을 막는 불필요한 규제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같은 규제가 생긴 이유를 되새겨 본다면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줄세우기는 민주당뿐만 아니라 야당에서도 오랜 계파정치의 부산물이었다. 줄세우기 또는 ‘오더(order) 투표’는 자파 소속 후보들을 당선시키거나 또는 다른 계파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행위를 말한다. 특정 후보를 지지하라는 ‘오더’가 떨어지면 지역위원장은 해당 오더를 각 대의원들에게 전파한다. 은밀하고도 주도면밀하게 떨어진 오더는 전대 판세을 흔들 변수가 된다. 지역위원장 또는 정치신인에게 있어서 공천권이라는 막강한 권력에 종속되기 쉬운 구조는 후보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오더 투표의 유혹은 전대 룰에서 비롯된다. 71만명이라는 초유의 선거인단이 참여한 전대였지만, 따지고 보면 대의원 표심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권리당원 71만명이 전체 투표 중 40%의 비중을 차지한 것과 달리 1만5000명 대의원은 45%에 달한다. 1인 1표의 등가가 적용되지 않는 ‘차별 선거’인 셈이다. 대의원 가운데 1만1000명 정도는 각 지역위원회별로 선출된다. 그 과정에서 지역위원장의 의중이 사실상 반영된다. 각 캠프에서 지역위원장의 호불호에 따라 판세를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때 민주당에서는 이 같은 구조를 깨기 위해 대의원 선출을 일반 권리당원에게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혁신안은 최종 논의과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역위원장이 대의원 선출 과정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막강했고, 지역위원장 선출 또는 공천 과정에서의 지도부 입김 또한 강력한 구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김달중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