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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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배려를 당연시하는 세태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선의로 사정을 봐주고 기다렸다. 이사를 하면서 전세금 일부를 돌려받지 못해 석 달을 참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를 보는 건 나였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류승범이 한 말,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이창훈 사회2부 기자
지난 6월, 이사를 앞두고 새집 전세금을 완납해야 하던 날 집 주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창훈씨, 미안한데 한 달만 시간을 줘. 돈을 다 못 구했어.” 다음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전세금 일부를 주기 어렵다는 호소이자 통보였다. 이사 날짜가 다가오는 동안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조금 불안했지만 그래도 정해진 날짜에 맞춰 전세금을 돌려받을 거라 믿었다. 3개월 전에 이사를 나가겠다고 이야기했고, 집주인도 그날에 맞춰 전세금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만기를 반년 앞둔 적금 통장을 해지했다.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간신히 전세금을 완납할 수 있었다. 이사를 마치고 만난 집주인은 미안하다며 한 달 안에 이자까지 더해서 돈을 돌려주겠다고 차용증을 써서 건넸다. 지난 2년간 보고 겪었기 때문에 그 정도 약속은 지킬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약속은 한 달이 지날 때마다 바뀌었다. 집주인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혹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집을 보러 안 온다고 하소연했다. 집주인의 호소에 ‘맞아. 이 더위에 나 같아도 집 보러 안 다닐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여름을 기다렸다.

“완전 호구네 호구.” 자취 경력이 10년 넘는 친구들은 내 상황을 듣자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배려라고 생각했던 내 기다림은 어느 순간부터 호구처럼 이용당하고 있었다.

돈을 돌려받지 못한 지 2달 반이 지나서야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임차권등기명령’이다. 세입자가 보증금의 일부나 전부를 돌려받지 못했을 때, 이사를 한 뒤에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해 주는 제도다. 쉽게 말하면 ‘집 주인이 과거 세입자에게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내용이 등기부등본에 남게 된다.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기 위해 내용증명을 보내자 다시 집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오히려 화를 냈다. “기다려 주기로 했으면서 왜 내용증명을 보냈나?”, “내가 언제 돈 안 주겠다고 했나?” 덕분에 깨달았다. ‘이 사람, 나를 진짜 호구로 생각했구나.’ 덕분에 예방주사를 톡톡히 맞았다. 법은 불편했지만 생각보다 가까웠다. 임차권등기명령, 보증금반환청구소송, 전세보증금반환보증보험 등 피 같은 전세금을 돌려받거나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다양했다. 번거롭지만 남은 돈을 돌려받기 전까지 내가 쓸 수 있는 수단을 모두 쓰는 것이 호구 세입자를 탈출하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가장 씁쓸한 건 돈 앞에 무너진 신뢰였다. 2년 뒤 이사갈 때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나중에 ‘깡통전세’의 피해자가 되면 어떡할까. 집주인이 나 몰라라 돈을 주지 않으면 세입자는 지루한 법적 공방에 들어가야 한다. 그 사이 돈 받지 못해 겪어야 할 고통은 오로지 세입자의 몫이다. 내 집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부동산 계약을 할 때마다 의심을 떨치지 못할 것 같다.

이창훈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