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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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화가’ 그린 그림… 누구의 작품인가 [S 스토리]

세계 각국 논의 어디까지/佛 AI 예술집단 ‘오비어스’ 그림 화제/세계 곳곳서 창조성 부여 실험 이뤄져/
EU, 2017년 AI 전자인간으로 인정 결의/日도 10년 넘게 저작물 보호 논의해와
“창조성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인공지능(AI) 예술집단 ‘오비어스(obvious)’는 8월21일(현지시간) 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작품을 만드는 공정에서 인간의 간섭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했다”고 말하며 창조성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것이 팀의 모토라고 말했다. 이들은 8월부터 홈페이지 첫 화면에 얼굴 부분이 뭉개진 듯한 초상화와 함께 이런 문구를 내걸고 있기도 하다. 이들이 내건 초상화는 마치 프린트 도중 오류가 난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순히 프린트된 그림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기계의 상상력이 동원된 작품이란 평가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프랑스 귀족 가문의 일원 ‘에드몽 벨라미’이며, 그는 11명의 친척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이런 설정은 모두 허구이며, 벨라미 가문은 실존하지 않는다. 마치 사람이 쓴 소설과 같은 셈이다. 이 모든 결과물은 오비어스가 머신러닝(기계학습)을 위해 작성한 코드를 컴퓨터에 입력시킨 뒤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사람의 지시를 받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학습을 거친 컴퓨터가 스스로 창조해낸 것일까.

◆예술분야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AI기술

오비어스는 이 작품을 컴퓨터가 만들어낸 AI 저작물로 주장한다. 근거는 인간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오비어스의 AI가 작품을 만들어낸 과정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나타내듯, 인간도 창작물을 만들 때는 다양한 외부정보를 받아들인다. 화가들이 그림 한 점을 그리기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느끼듯, 컴퓨터에 방대한 데이터를 입력하고 이를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한 뒤 작품을 생성해내는 과정이 화가들의 활동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오비어스팀은 “인간이 만든 창조물도 무(無)의 상태에서 갑자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계학습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매에 출품하는 작품뿐 아니라 이들의 모든 작품의 저자 이름난은 ‘min G max D Ex [log D (x))] + Ez [log(1 ? D(G(z)))]’라는 수식으로 채워졌다. 단순히 사람의 명령하는 지점에 기계가 붓을 움직여 그린 그림이 아니라 기계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세계 각국에서 AI 창작물에 관심 증가

오비어스의 AI가 만든 초상화와 같이 기계에 창조성을 부여하는 실험은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독일 남부 카를스루에 소재 ZKM아트미디어센터는 8월31일까지 ‘오픈 코드’라는 이름으로 AI가 만들어낸 예술작품들을 전시했고, 프랑스 파리 유명 미술관인 ‘그랑팔레’에서도 지난 4월5일부터 7월9일 사이 로봇이 예술가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렸다. 영국에서도 이에 질세라 런던의 유명 박물관인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서 9월부터 AI에 대한 전시회가 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AI 예술에 뛰어든 사람들도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다양하다. 오비어스의 경우 AI 그림 제작 프로그램을 만든 3명의 청년은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두 명은 경영학을, 한 명은 공학을 전공했다. 인도의 AI 예술 연구그룹인 ‘1/64’도 예술가와 경제학자, 미술관 큐레이터 등 AI를 활용한 미술에 관심이 있는 실험적인 젊은 층들이 주축이 됐다.

프랑스의 유명 미술품 수집가 니콜라 로제로-라세르는 이들의 활동을 놓고 “역사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기반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프로그램이 개발된 것이 놀랍다”며 “기존 예술가들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따로 차세대 창작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AI 화가의 저작권은? 법적 문제도 제기

하지만 AI 저작물이 실제로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판단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작품을 만들어낸 당사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규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계에서는 직접 만들지 않은 작품에 대해 그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8월17일 항소심에서 무죄선고가 내려진 가수 조영남씨의 ‘대작(代作) 사건’에서도 “누가 그림을 그렸느냐”가 문제가 됐다. 아이디어만 제공한 조씨와 이를 수행한 조수들의 관계를 법조계와 예술계가 서로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법원은 아이디어의 원천을 중시하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2부(부장판사 이수영)는 “보조자를 사용한 제작방식이 미술계에 존재하는 이상 이를 범죄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에 대해 예술계의 반응은 뜨거웠다. 선고 이후인 지난달 23일 한국미술협회는 법원 판결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면서 “미술이란 창작활동으로 남이 그려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자주 논란이 되고 있다. AI 예술품은 단순보조자를 뛰어넘는 것이 사실이지만 개발자가 AI 코드를 제작하는 순간 그 또한 하나의 창작자로서 개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AI 예술품은 순수 AI의 창조물로 봐야 하는지 의견이 엇갈린다.

독일의 AI 예술가 마리오 클링거만은 “내가 예술가이며 AI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는 오비어스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는 AI가 특정한 코드를 입력하는 것보다 나아가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을 고안 중이라며 “무엇이 예술가를 만드는 요소인지 정립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AI 창작물에 대한 법적 논의 어디까지 왔나

AI 저작권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10년 넘게 AI 저작물 보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2년 전 AI저작물 보호에 대한 논의를 담은 보고서도 출간했다. 일본 지적재산전략본부는 당시 AI 창작물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공식 제안하면서 AI 창작 인센티브 보호에 대한 내용을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AI 창작물 전시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유럽연합(EU)의 움직임도 이에 못지않다. EU는 2017년 1월 AI 로봇의 법적 지위를 전자인간으로 인정하는 결의안에 의결했다. 또 2014년에는 로봇 법 프로젝트를 통해 ‘로봇규제지침’을 제정했다. 이 가운데는 AI가 만든 지식재산에 대해 법적으로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국내에서도 AI 저작물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해당 저작물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상황이다. 저작권의 주체를 ‘사람’으로 한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수정할 수 있을지도 변수다. 특히 AI가 저작물뿐 아니라 경제, 산업은 물론 정치와 사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논의가 제기돼 별도의 특별법을 제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란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정선형 기자 linea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