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허익범 특검 쓴소리가 남긴 것

“정치권에서 수사에 대해 지나치게 편향적인 비난이 계속된 점은 심히 유감스럽다.”

‘드루킹’ 댓글 조작사건 수사를 이끈 허익범 특별검사가 지난달 27일 수사결과 발표를 마치고 밝힌 소회다. 허 특검은 법조계에서 ‘신사적 합리주의자’, ‘조용한 뚝심’ 등으로 불린 인물이다. 
김범수 사회부 기자

수사 기간 내내 언론과 정치권의 각종 비판에도 묵묵히 제 갈 길만 걸어온 허 특검이었다. 그랬던 그가 그간 마음 언저리에 쌓아온 불쾌한 감정과 솔직한 생각을 여과 없이 털어놨다.

드루킹 특검은 태생부터 ‘정치적’이었다. 자유한국당 등 야권은 지난 5월 추가경정 예산안을 볼모로 특검 실시를 요구했다. 명분은 ‘드루킹 사건 진상규명’이었지만 문재인정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우여곡절 끝에 특검법이 통과되자 곧바로 법조계에선 ‘과연 누가 독배(毒杯)를 받게 될까’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기자도 특검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과 접촉했다. 대개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성과는 없는데 욕은 욕대로 먹을 테니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핵심 수사 대상인 김경수 경남지사와 이름이 같은 김경수 전 대구고검장도 특검 후보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김경수가 김경수를 조사하다니, 말이 되겠어요”라며 웃었다. 허 특검도 그에게 특검 자리 제안이 왔을 때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독배를 들었다.

특검 수사결과는 예상대로 아쉬웠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니 특검의 잘못은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 게 아니고 야당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수정당한테는 ‘채찍질’을 당하고 진보진영으로부터는 온갖 조롱과 비난에 시달린 점을 떠올리니 더더욱 그러했다.

특검팀은 수사 기간 내내 외로웠다. 일부 정치권을 제외하면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 정치권조차 막상 수사가 끝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언급을 아꼈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특검을 통해 무슨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도 아니다. 진보와 보수 이분법적 사고로 분열된 여론은 우리 사회에 깊은 상처만 남겼다.

과거에는 ‘정의란 복수를 통해 이뤄진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복수 같은 사적 제재는 몰상식이고 범죄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예전에 복수가 하던 역할을 선거에 맡겼다. 선거에 진 세력이 다시 국민 지지를 받아 다음 선거에 이기면 그게 바로 복수다.

박근혜정부는 박영수 특검의 국정농단 사건 수사를 계기로 몰락했다. 이후 보수정당은 지난해 5월 대선과 올 6월 지방선거라는 두 차례 선거에 지며 최대 위기를 맞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야당은 또 다른 특검으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오기’에 사로잡힌 것 아닐까.

특검은 국민 대부분이 공감하는 사안에서 여야 합의로 실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특별한 만큼 그 도입은 최소에 그쳐야 한다. 특검이 자꾸 정치적 보복에 동원된다면 국민이 과연 특검을 신뢰할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까지 뒤흔들 수 있다. 특검은 만사형통이 아니다.

김범수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