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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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기민 "힘들었냐구요? 쉽기만 하면 불행한 거죠"

세계 정상급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

‘마린스키의 왕자’ 김기민(26)은 어른스럽고 진지했다. 19살에 세계 정상급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해 한 달 만에 주역으로서 큰 무대를 책임져야 해서였을까. 최근 서울 서초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기민은 “외국 나가면 서른 살 이상으로 본다”고 했다. “수석무용수로 선 건 4년이지만 주역을 한 건 8년째라 사람들이 ‘얘는 적어도 30대 이상은 됐겠구나’ 짐작하는 것 같다”고 한다.

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은 “러시아에서 클래식 음악을 하는 친구들과 자주 어울린다”며 “그들과 이야기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편안해진다”고 말했다.   허정호 선임기자
“저도 그리 느껴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랑 얘기해보면 ‘내가 다른 곳에서 놀고 있었구나’ 싶긴 해요. 어쩔 수 없었던 게, 어릴 때부터 어른들과 지내는 환경이었어요. 주역 타이틀 달고 나서 제 파트너도 서른살 넘은 선배들이었고. 또 어렵고 철학적인 작품을 할 때면, 그 철학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했죠. 인생 공부도 같이 된 거예요.”

그는 “그런데 그게 좀 콤플렉스”라며 “더 어리게 놀고 싶어서 오히려 ‘친구들이랑 놀기’에 신경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김기민이 오는 11월 15∼18일 마린스키 발레단과 내한한다. 지난해 마린스키 분관인 프리모르스키 스테이지 발레단과 함께 왔던 것과 달리 올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동료들과 ‘돈키호테’의 시골 청년 바질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선다. 그는 “‘돈키호테’는 제 발레 스타일과 잘 매치되는 작품”이라며 “제 성향에 맞다고 말씀들 하시더라”고 했다. 이어진 바질에 대한 설명은 자기소개처럼 들렸다.

“바질은 자신감 넘치는 남자예요. 유쾌하고, 활발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넘쳐요. 스페인의 강렬함이 묻어나오죠. 돈이 없어도 섹시하고, 원초적 카리스마를 가진 남자가 있잖아요. 제가 연기할 바질도 관객이 반할 만한 인물일 겁니다.”

김기민은 지난해 11월, 올해 4월 연이어 한국을 찾았다. 그의 춤을 눈으로 확인한 이들의 감탄 소리가 높아져 간 건 당연. 이런 반응을 전하자 그는 “인기나 명예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지난 3, 4년간 인터뷰를 아예 안 했던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마린스키 수석무용수 김기민이 주연한 발레 ‘돈키호테’. 나타샤 라지나 제공
“지금 인터뷰를 하는 건 한국 발레 발전과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되지 않을까 해서예요. 사실 한동안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안 하기도 했어요. 물론 제 춤을 사랑해주시니 정말 감사하죠. 하지만 인기보다는 춤의 완성도에 좀 더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팬들이 많이 아쉬워 하세요.”

그의 팬은 독일, 이탈리아, 미국, 영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 걸쳐 있다. 가끔 손편지나 소포를 받는다. 러시아까지 찾아오는 팬도 있다. 아이돌팬도 아닌데 ‘원정 관람’이라니. 김기민은 “외국 발레 팬은 다르다”며 “외국에서 발레리노라고 하면, 특히 러시아에서 마린스키에 있다고 하면 벌써 대우가 다르다”고 했다. “제 자랑이 아니라”라고 전제를 붙인 그는 마린스키만 해도 한 달에 36번의 전막 공연이 있는 점, 하룻밤에 5개 발레단이 대형 작품을 올려도 객석이 꽉 차는 현실로 러시아 내 발레 위상을 설명했다.

발레 본고장에서 최고에 오른 김기민의 인생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같다. ‘발레 신동’으로 중학교 졸업 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고, 19살에 유일한 동양인 단원으로 콧대 높은 마린스키에 들어갔다. 수석무용수가 된 건 23살 때인 2015년. 2016년 ‘브누아 드라당스’ 최고 남성무용수상을 받았고, 프랑스·영국·미국·오스트리아 등 세계적 발레단으로부터 초청이 줄잇고 있다.

이런 그도 초등학교 5학년 무렵 교수들로부터 ‘얘 발레시키면 돈 버리는 일’이란 얘기를 들었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믿었고, 발레리노 이원국에게 테스트 받은 후 ‘재능이 너무 많은 아이’라는 평을 받았다. 김기민은 “이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발레를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어린 나이에 후배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런 경험에서 나온 듯했다.

“간접적으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는 건 제가 무조건 해야 할 일 아닌가. 러시아 친구들 보면 예술을 위해, 예술만 생각하고 쭉 살았더라고요. (한국은) 예술만 생각하기 힘든 환경이기에, 제 후배들은 좀 쉽게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늘 화려하고 대단하게 조명받지만 그는 “실수도 많고 단점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제 춤에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너무 많고, 그걸 평생 갖고 가야 할 것 같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마린스키에서 최고에 오르기까지 힘들지 않았냐고 묻자 “너무 집중하느라 힘들 겨를이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주역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어요. ‘다음 공연, 다음 공연’ 하며 계속 쌓아오다보니 주역이 된 것 같아요. 물론 힘들었죠.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요. 다 힘들죠. 힘들다는 건 행복한 거죠. 가장 불행한 것은 계속 쉽고, 쉬기만 하는 거. 그게 불행 중의 불행이죠.”

그는 최근 자신의 유튜브 동영상 70여개에 대해 삭제를 요청했다. 후배들이 자기 영상을 보여 달라 하면 거절한다. “무대에서 환호 받아야지, 무대 밖에서 왜 환호 받느냐”는 생각이다.

“영상도 영상이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무용수가 되고 싶어요. 기쁨이란 건 자기 관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제 기쁨은 그래요.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알아봐주고. (관객으로부터) 제 춤을 기억해주는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그게 가장 기뻐요. 기록물을 남기면 ‘내가 이만큼 했어’ 하는 자랑거리를 남기는 건데요. 저는 자랑거리에 관심 없어요. 무용수는 어차피 잊혀질 사람이에요. 지금 제가 할 일은 춤을 잘 추는 거지만, 나중에는 저보다 더 잘하는 무용수가 나와야죠. 그게 제 할 일이에요. 여기서 제가 ‘잘 추는 사람’이라고 끝내버리면, 얼마나 이기적이고 한국 발레계에 슬픈 일이겠어요.”

그는 “전 지금 세계 최고 발레리노가 되겠다는 꿈은 없다”며 “이름을 알리는 것보다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완벽한 춤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마린스키 발레단에도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에이, 그런다고 설마 제가 밀려나겠어요. 하하. 모르겠어요. 밀려나면 밀려나야지.”

송은아 기자 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