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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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는 부정선거" 한마디에 징역형…40년 만에 '무죄'

중학생들에 "충효사상 교육은 박정희 1인독재 수단" 했다가 괘씸죄도 /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형 확정… 40년 만에 재심서 무죄
역사학회장을 지낸 국내 동양사학계 원로가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 위반죄로 징역형이 확정됐다가 꼭 40년 만에야 재심 무죄 판결로 명예를 회복했다.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김우수)는 1978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죄로 징역 1년6개월 실형이 확정된 조병한(72) 서강대 명예교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14일 밝혔다. 유신정권 시절인 197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발동한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조 명예교수는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던 1977년 4, 5월쯤 3학년 학생들에게 “충효사상 교육은 (박정희) 1인 독재를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 것이 빌미가 돼 이듬해 검찰 수사를 받고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 재판에 넘겨졌다. 그가 1977년 12월 역시 자신의 제자들에게 6·25 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를 강의하던 중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개표할 시 반대표 몇 트럭분을 불살라버린 적이 있다”고 말한 것도 유언비어 유포에 해당한다는 검찰 판단에 따라 긴급조치 9호 위반죄가 적용됐다.

박정희정권은 유신헌법을 선포하기 직전인 1972년 11월21일 새 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다. 유신헌법 시행 후 개헌 요구가 거세지자 1975년 2월12일 다시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두 번 다 압도적 표차로 유신헌법에 찬성하는 의견이 이겼으나 공무원을 동원해 반대의견을 누르고 찬성표가 많이 나오게끔 불법을 저질렀다는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조 명예교수는 1978년 3월 1심에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이 선고됐다. 같은 해 6월 서울고법 항소심은 “형량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며 1심을 깨고 징역 1년6개월에 자격정지 1년6개월로 낮췄다. 조 명예교수는 2심에도 불복해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같은 해 9월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재판부는 재심사건 판결문에서 “옛 유신헌법 53조에 규정된 긴급조치권에 근거해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그 발동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목적상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에 비춰보더라도 위헌·무효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적용 법령이 당초부터 위헌·무효이므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며 “유죄의 원심 판결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조 명예교수는 민주화 이후에도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문재인정부 출범 후 대검찰청 공안부가 유신정권 시절 긴급조치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차원에서 본인이 사망 등 이유로 재심을 청구하지 못한 경우까지 일괄해 재심을 청구하면서 조 명예교수도 검사가 그를 대신해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이번에 무죄 판결이 확정된 것이다.

동양사학자인 조 명예교수는 서울대 학부 및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서강대 사학과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2007년부터 2년간 역사학회장을 지냈으며 학회장 재직 중인 200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역사상의 공화정과 국가 만들기’라는 주제로 제51회 전국역사학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