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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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공공기관 지방 이전과 저출산

#1. 공기업에 근무하는 한 지인은 회사가 2015년 지방으로 이전할 때 퇴사를 고민했다. 미혼인 그는 연애와 결혼 걱정이 앞섰지만 간절히 바라던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놓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일단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공기업과 공공기관이 이전한 혁신도시에서는 한때 ‘청춘 남녀 만남을 위한 장’도 펼쳐졌다. 주변의 권유를 받아 한두 번 나가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30대 중반인 요즘, 연애와 결혼은 그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2. 서울의 한 공공기관에 다니던 다른 지인은 직장이 지방으로 이전하자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연고 없는 벽지에서 일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지방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가 연고도 없는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니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못할 것 같아서 일을 그만뒀다. 서울 소재 다른 사기업에 취직한 그는 원하는 일을 하진 않지만 비교적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새 직장을 다니면서 상대를 만났고 내년에 결혼한다.

최형창 정치부 기자
#3. 지방으로 이전한 공기업에 다니던 한 후배는 반년을 채 다니지 못하고 그만뒀다. 외롭고 적막해 자주 우울감에 빠지곤 했다. 그는 1년을 다시 준비해서 서울 소재 공공기관에 입사했다. 급여는 이전만 못하지만 서울 근무에 만족해했다. 그런데 그는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수도권에 있는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자 한숨을 내쉬었다. 추석을 앞두고 만난 그는 “연고도 없는 곳에 가면 결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공기업·공공기관 2차 지방 이전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 대표가 취임 후 화두를 던지면서 이전 추진에 탄력이 붙었다. 지역균형발전 측면에서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반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대책 없이 추진하는 공공기관 지방이전은 비혼과 저출산을 더 가속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대표를 포함한 민주당 의원들은 공공기관 지방이전이 왜 비혼과 저출산을 심화시키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 대표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직장이 가면 젊은 사람들은 다 간다. 저출산과는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왜 관련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앞선 사례들을 보고도 정말 연관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연애를 하고 결혼하는 커플이 늘어나야 갓난아이 울음소리도 더 자주 들리는 법이다. 그런데 공공기관 지방이전은 주말커플, 주말부부를 양산한다.

사람이 많아야 연애 상대 찾기도 수월한데, 청년이 연고도 없는 지방으로 가면 짝을 찾기 더 막막해진다. 또 연애를 하더라도 커플 중 한 명의 직장이 서울에서 갑자기 지방으로 옮겨지면 그 연인의 지속가능성은 장담할 수 없다. 결혼을 하더라도 주말부부가 될 수밖에 없다. 주말부부는 ‘독박육아’가 될 가능성이 커져 둘째, 셋째 아이를 가지려는 엄두를 못 낸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으로 인해 지역 인재들에게 기회가 열린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국가가 강제로 직장을 옮겨버리는 건 개인에게 너무나 폭력적인 방식이다.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정책들은 좀 더 신중히, 부작용은 최소화하면서 내놓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형창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