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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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노인의 날

예전에는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효(孝)에 뿌리를 둔 경로(敬老)사상을 사회윤리의 근간으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이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라며 “지난해 처음으로 양로 연회를 베풀고 늙은 신하들에게 몸소 나아가 손수 대접했는데, 각 고을 수령들은 내 뜻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개탄한 기록이 있다. 이어 각도 감사에게 “만일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수령이면 중죄로 논할 것이요, 감사도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추상같이 호령했다.

노인을 상징하는 물건이 지팡이다. 가볍고 단단한 명아주 줄기로 만든 것을 청려장(靑藜杖)이라 한다. 노인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지팡이다. 나이 70세가 되었을 때 나라에서 주는 것을 국장(國杖), 80세 때 임금이 내리는 것을 조장(朝杖)이라 했다. 조선 후기 문신 이민구는 ‘만경암을 유람하다’라는 시에서 “덧없는 인생 의탁할 곳 없어/ 다시 청려장 짚고 산 내려가네”라고 노래했다. 노년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오늘이 제22회 노인의 날이다. 경로효친 사상을 확산시키고 노인의 노고에 감사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1997년 제정된 법정기념일이다.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린다. 정부 주관 행사에서 노인단체 자율 행사로 바뀐 뒤엔 형식에 그치는 느낌이다. 노인의 사회적 위상을 말해주는 듯하다. ‘혐로(嫌老, 노인 혐오)’라는 말까지 나온다. 어느샌가 원로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가 됐다. 철학자 김형석은 ‘백년을 살아보니’에서 “원로가 있는 사회와 없는 사회는 다르다. 지혜로운 조부모나 부모가 있는 가정과 없는 가정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올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서면서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하지만 고령사회를 꾸려나갈 채비는 돼 있지 않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누구도 부양 책임을 떠안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니 노인 근로자가 급증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 노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맹자’에서는 “백발노인이 봇짐을 지고 길거리를 헤매는 일”을 정치 파탄의 징후로 여겼다. 노인 문제야말로 최우선 국정과제로 삼을 일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