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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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물리학’ 망언

여성 비하 논란으로 동네북 신세가 된 영국 생화학자가 있다. 2001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팀 헌트다. 그는 2015년 6월 서울 강연 도중 “실험실에 여성들이 있을 때 세 가지 일이 일어난다”면서 농담조 발언을 했다. “당신은 그들과 사랑에 빠지고, 그들도 당신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당신이 비판을 하면 그들은 눈물을 터뜨린다.”

후폭풍은 자못 거셌다. 발언 파문이 트위터를 통해 ‘여성은 울기만 해서 골치’라는 취지로 번졌기 때문이다. 헌트는 “반어적 농담”이라고 했다. 그는 문제의 발언에 이어 “진지하게 말하자면”이라 전제하고 한국 발전에 대한 여성과학계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과학에 더 많은 여성들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헌트의 해명은 일리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헌트를 잘 아는 여성과학자들도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고 변호했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헌트는 급기야 “끝장났다”면서 눈물을 터뜨렸다.

미국 재무장관을 지낸 경제학자 로런스 서머스의 사례도 유명하다. 그는 하버드대 총장 시절인 2005년 1월 비공개 회의에서 과학·공학 고위직에 여성이 적은 이유와 관련해 여성의 양육 부담이 크다는 점과 함께 과학·수학 최우등생 비율이 낮다는 점을 들며 “남녀간 선천적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고 했다. 비난이 빗발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새 버전이 나왔다. 이번 주인공은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고위 과학자 알레산드로 스트루미나다. 최근 열린 CERN의 스위스 워크숍에서 “물리학은 남자가 만들었다. 초청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고 발언한 것이다. 섶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이들이 왜 줄을 잇는지 모를 일이다. CERN은 직무정지로 답했다고 한다.

미국 코미디언 그로우초 막스는 “남들 실수에서 배워야 한다. 그 실수를 전부 겪어보기에는 인생이 짧다”고 했다. 스트루미나는 뭘 배운 것일까. 헌트에겐 항변의 여지라도 있지만 이번엔 그것조차 있는지 의문이다. 때마침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3인 중 1인으로 여성학자가 선정됐다. 도나 스트릭랜드 캐나다 워털루대 교수다. 스웨덴 노벨상위원회가 ‘물리학’ 망언에 보낸 답인지도 모른다.

이승현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