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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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4차 산업혁명 발목 잡는 ‘조직문화’

요즘 어딜 가도 ‘4차 산업혁명’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정보기술(IT) 강국의 뿌리를 가진 우리나라로서는 더 큰 기대감을 투영하게 되는 시대다. 차세대 핵심역량 중 하나인 ‘창의성’도 K팝, 게임산업, 한류 열풍 등의 성과로 증명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기도 한다. 기대만큼의 속도감 있는 혁신이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서다. 어쩌면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문화’에 있다는 생각에 이른 건 한 업계 관계자와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좀 더 정교하게 말하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조직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수직적인 업무 결정은 물론 여전히 나이를 가장 먼저 따지는 문화, 경직된 호칭과 존대어 구분 등은 급변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지혜 산업부 기자

이 관계자에 따르면 가장 큰 문제는 ‘올드한’ 조직이 젊은 세대로 권력 이양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있기에 발생한다. 혁신과 IT 전문성, 문화 콘텐츠 등에 특화된 건 다름 아닌 2030 세대인데 산업화 시대에 굳어진 수직적 기업문화는 이들을 제약할 뿐이다. 연공서열 및 군대식 상명하복 문화에 갇혀 있는 한 젊은이들이 거리낌없이 목소리를 내고 능력을 발휘할 환경은 조성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젠 동양문화 탓을 하기도 힘들게 생겼다. 같은 유교권 국가인 한·중·일 3국 중에도 한국은 변화가 가장 느리다. 최근 젊은 스타트업이 급증한 중국은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 요람’이라 불릴 정도다. 스타트업 성장 속도로는 미국을 능가한다는 평가다. 언뜻 보기에 집단주의가 팽배한 일본도 우리만큼 나이를 따지진 않는다. 나이보다 직급 중심의 문화가 잘 정착돼 있고, 존대어 사용도 경직성이 덜한 편이다.

국내에서도 글로벌 혁신 경쟁을 정체시키는 조직문화에 대한 문제 인식은 확산하고 있다. 지난달 초 모바일리서치 기업 오픈서베이와 잡앤(N)이 발표한 직장인 1000명 대상의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80.6%가 ‘퇴사를 고민한 적 있다’고 답했는데, ‘낮은 연봉’(52.7%) 다음으로 많이 꼽은 이유가 ‘상사의 갑질과 잦은 야근, 상명하복 등 후진적 조직문화’(44.2%)였다. 지난 1일 한 매체가 발표한 경제전문가 15명 대상의 조사에서도 우리 기업의 선진화를 위해 ‘경직된 조직문화’(73%)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문제인 걸 알고는 있는데 바뀌진 않으니 혁신을 노래하기만 하지 정말 원하고 절실한지 의문스럽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혹은 서서히 바꾸어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원천 기술이나 자원이 풍부해 이 모든 걸 무시해도 될 수준이기라도 한가. 남들은 뛰다 못해 날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런 여유를 부려도 좋을지 우려스럽다.

옛날 옷 그대로 입고 새 세상에 나가려니 걸음이 지체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인식과 문화의 대전환이 바탕이 돼야 하는 이유다. 물론 대수술은 고통스럽고 무섭다. 하지만 도태되는 건 더 무서운 일이다. 기득권은 눈앞의 안녕을 우선시하고, 젊은 세대는 변화를 꾀할 용기와 에너지가 없어 이를 자초한다면 서로 책임을 회피하며 무력하게 후퇴한 미래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정지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