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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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茶는 곧 내 인생… 천년 세월 함께할 다원 꿈꾸죠”

전통식품명인 제 18호 신광수씨 / 어릴적부터 선암사 차 시중 들며 야생작설차 전승 17대 계보 이어 / 개량종, 생산량 많지만 질 떨어져 / 재래종·전통 제다법 고집한 이유 / 차, 마시는 이 성품·인격에도 영향 / 생명 걸어놓은 듯 귀하게 만들어
‘천년 고찰’ 전남 순천 선암사 초입 마을 ‘죽학리’에는 내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차(茶) 명인이 산다. 대한민국 제18호 전통식품명인 신광수(66)씨의 삶의 터전인 야생 죽로차 밭에는 세계 3대 명차인 인도의 다르질링차, 스리랑카의 우바차, 중국의 무이차의 차밭과 같이 고산지대에 있다. 신 명인은 이른 봄에 싹을 틔운 작은 첫 찻잎만을 엄선해 ‘야생 작설차’를 만든다.

스님에서 스님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선암사 차인 ‘야생 작설차’ 제조법을 이어오고 있는 신 명인을 7일 만났다. 반평생 동안 야생 차 명맥을 지켜온 신 명인은 선암사 작설차 다맥전승계보로는 1500년대 의병(승병)장으로도 활약했던 청허 휴정 스님 이후 17대째다.

신 명인이 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선친이 불교에 귀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선암사 스님들의 차 시중을 들게 되면서다. 그는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스님들의 차 시중을 들게 됐고 16세 때 본격적으로 제다(製茶)법을 전수했다. 신 명인의 다업(茶業)은 군 제대 후 본격화했다. 10대 때 배웠던 차 제조법을 익히고 또 익혔다. 가마솥에 덖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 지문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
신광수 명인이 7일 전남 순천 선암사 초입 마을 ‘죽학리’ 야생 작설차 작업장에서 상품성이 떨어진 찻잎을 골라내고 있다.

“개량종 차는 생산량이 많아 수지를 맞추기에는 좋으나, 차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 명인이 야생차를 전통 방법으로 만드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다. 그는 “차를 시작하면서 ‘차는 나 신광수의 새로운 인생’이라고 항상 되뇌었다”며 “차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의 본(本)이었으므로 그 본을 잃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 명인은 항상 ‘나만이라도 천년의 세월을 함께 꽃피울 수 있는 차밭을 조성하자’는 생각으로 차와 궁합이 맞는 땅을 선택하느라 7년을 고생했다. 매입한 땅에 차밭을 일구면서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조계산 기슭 해발 700m 정도 되는 곳에서 생산되는 차가 생육 조건으로 최상이다. 신 명인은 총 49만5900㎡에 달하는 재래종 야생 차밭에서 자란 잎으로 차를 만들고 있다. 그러다가 그는 1982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미국 대사관 직원에게 우연히 차를 대접한 것이 계기가 돼, 일본 다류 품평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이다. ‘차 마니아’ 일본 다인들에게 ‘최고의 차’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에 그가 만든 차의 우수성이 널리 퍼져나갔다.

국내외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탐방객들은 차밭의 기운을 느끼며 신 명인과 함께 차를 만든다. 신 명인의 차가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가치를 인정받은 데는 차에 대한 그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차 생육에 적합한 조계산 일대의 기후 풍토,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재래종 차나무가 큰 몫을 했다. 신 명인은 “차를 만드는 데는 자신이 생명을 걸어놓은 듯 엄정하게 작업해야 한다”며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을 고양해 줄 수도 있는 귀한 식품이라는 뜻이다.

최상의 기후 조건에서 그가 만든 차는 ‘명인 신광수차’라는 브랜드로 국내 유명 백화점은 물론, 일본과 유럽 등지로 수출하고 있다. 잘 나갈 때는 연매출액이 10억원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에서 주문이 쇄도하면서 2000년 수출 유망 중소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비료나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재배한 찻잎은 2001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유기농산물 인증을 시작으로 2008년 일본 유기인증(JAS), 미국 식품의약청(FDA) 승인도 받았다.

50여년의 수제차 제다 경력을 인정받아 1999년 ‘전통식품명인 제18호’로 지정됐다. 신 명인은 2013년 (사)한국전통식품명인협회장에 올라 6·7대 회장직을 수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014년 선인들의 차에 관련한 지혜와 자신의 경험을 묶어 ‘신광수 명인의 우리 茶(차) 이야기’를 펴냈다. 2014년에는 식품·외식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 2015년 전남도 친환경 농업대상에서 가공부문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천년의 세월을 함께 웃고 살 수 있는 씩씩하고 시원한 기운을 품은 차밭을 항상 꿈꾼다”는 그의 모습에서 야생 전통차를 지키려는 집념을 엿볼 수 있었다.

순천=글·사진 한승하 기자 hsh6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