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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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웰 다잉

재작년 12월 말 어머니 임종 직전에 겪은 일이다. 췌장암 투병 중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살게 해보려고 스탠트 수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합병증이 몰려와 중환자실로 가야 했다.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자 담당 의사는 “연명치료를 안 하면 곧 사망”이라며 선택을 요구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평소 어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관을 주렁주렁 매단 채 중환자실에 두지 말아라”고 당부했다. 그 덕분에 가족 대표로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에 사인할 수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말기 전립샘 암환자인 김병국(85) 할아버지는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낸다. 지난 8월 중순에는 ‘생전(生前) 장례식’도 열었다. 지인들에게 보낸 부고장에는 “검은 옷 대신 밝고 예쁜 옷을 입고 오세요”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죽은 다음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며 평상복을 입고 지인 50여 명과 즐겁게 춤추며 이별 파티를 벌였다. 일본 건설기계업체 고마쓰의 안자키 사토루(安崎曉) 전 사장은 지난해 12월 신문에 생전 부고장 광고를 내고 생전 장례식을 열어 화제가 됐다.

편안하고 깔끔하게 세상과 이별하는 게 웰 다잉(well dying)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노인인권종합보고서’를 보면, 노인 83.1%가 ‘존엄사 찬성 및 무의미한 연명치료 반대’에 동의한다고 응답했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연명치료 대신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돕는 ‘호스피스 서비스 활성화’에 동의하는 노인도 87.8%나 됐다. 장기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연간 5만명에 이른다. 가족도, 환자도 고통스럽다.

2월 존엄사법(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시행 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한 환자가 2만명을 넘어섰다. 시행 초 3200여 명 보다 7배 가까이 늘었다. 20년 논쟁 끝에 시행한 존엄사 제도가 임종문화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평소 부모님과 연명치료 및 존엄사에 대한 대화를 해야 한다. 준비 없이 맞으면 십중팔구 연명치료를 선택하고 그 결과는 엄청난 불행으로 이어진다. 남은 가족이 큰 부담을 짊어지는 걸 원하는 부모는 없지 않을까.

채희창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