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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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성이는 가을, 노을에 물들다

경남 창원의 재발견
낮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한 무리의 일행들이 걸어온다. 부쩍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닷바람에 어깨를 움츠린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차를 마시러 우르르 카페로 들어간다. 직장인이 많은 회사 근처라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차이점이 있다. 이들이 입은 점퍼가 모두 회색빛으로 똑같다는 것이다. 일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복 입은 학생들이 등교할 때처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이 같은 점퍼를 입고 있다. 회사에서 지급한 똑같은 디자인의 회색 점퍼를 입은 채 식사 후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는다. 회사가 달라도 밝은 회색이나 짙은 회색 혹은 남색으로 색깔만 다를 뿐 디자인은 거기서 거기다. 공장이 밀집한 경남 창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심 때 풍경이다.

여행보다는 출장이란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곳이 창원이다. 마산과 진해, 창원 세 지자체가 통합된 창원은 산업도시로만 여기기엔 세 지역의 매력이 잘 살아 있다. 가을날씨를 만끽하며 호젓하게 분위기에 젖어들기에 좋은 장소들이 곳곳에 있다.
주남저수지 주변 주민들은 배를 타고 한여름 저수지를 화려하게 물들인 연꽃과 연잎을 수거한다.
한두 달 전이었으면 주남저수지는 연꽃들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시든 연잎 사이로 떠다니는 배를 보는 것이 전부다. 아침이면 남은 연잎 사이로 배들이 돌아다닌다. 지역 주민들이 한여름 저수지를 화려하게 물들인 연꽃이 지자, 이를 수거하는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얼추 청소가 됐는지, 저수지는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속살을 드러낸 저수지는 이달 말부터 다시 손님들로 가득 찬다. 지금 하는 청소가 어찌 보면 손님맞이일 수도 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수천㎞를 날아온 철새들로 저수지는 빈 자리가 없게 된다.

연꽃은 사라지고, 철새는 오기 전인 이맘때 저수지는 휑하다.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저수지는 휑하지만, 이를 둘러싼 제방은 오히려 이때 가장 화려해진다. 제방을 따라 이어진 탐방로는 가을이 무르익으면서 억새가 점점 굵어지고 한편으로는 하얀색, 보라색, 분홍색, 빨간색의 코스모스가 가을 바람에 일렁인다.
창원 주남저수지에선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진 후 하늘이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휑해 보이던 저수지는 붉은 구름이 그대로 내려앉은 도화지로 변한다.

해가 산 너머로 질 무렵 이 길을 걸으면 화려함은 극에 달한다. 한낮의 밝은 빛이 아닌, 일몰 전 점점 붉어지는 햇빛이 억새와 코스모스를 비추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풍광이 펼쳐진다. 흰 억새도 붉어지고 코스모스도 붉은빛이 더 강렬해진다. 짜릿한 풍광은 가을처럼 순식간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진 후에는 하늘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하늘의 흰 구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붉게 화장한 구름이 하늘을 장식한다. 하늘뿐 아니라 어느새 저수지마저 이 붉음을 그대로 품에 안는다. 휑해 보이던 저수지는 붉은 구름이 그대로 내려앉은 도화지로 변신한다. 시시각각 붉음의 농도가 달라지다 주위가 점차 어둑해지면서 화려한 한 편의 쇼는 마무리된다. 어떻게 그려질지 예상할 수 없는 한 폭의 가을 명화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주남저수지란 명칭은 주위의 동판저수지, 산남저수지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 세 저수지를 합치면 면적은 약 900㏊에 이른다. 지금이야 제방이 쌓여 있어 피해가 없지만, 주민들에겐 때로는 재앙이, 때로는 선물이 됐다. 낙동강 배후습지였던 이 일대는 홍수가 나면 수시로 범람했다. 낙동강 퇴적물이 쌓여 물이 잘 빠지지 않고 고여 있어 낙동강이 범람하면 이 일대 마을과 농경지는 침수됐다.

현재의 제방이 모습을 갖춘 건 일제강점기 때다. 일본인이 설립한 촌정농장이 1920년 주남저수지 일대를 농경지로 개간하면서 홍수를 막기 위해 9㎞가 넘는 제방을 쌓았다. 당시엔 마을 이름인 용산늪, 산남늪, 가월늪 등으로 불렸는데, 1970년대 들어 지금의 주남저수지, 산남저수지, 동판저수지 이름을 갖게 됐다.
주남저수지 탐방로 주위에 핀 억새와 코스모스가 가을 바람에 일렁이고 있다.
주남저수지는 가창오리 등 10여만마리의 철새들이 군무를 펼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다른 저수지와 달리 제방엔 사람 키보다 높게 나무로 담이 세워져 있다. 담 중간에 저수지 풍경을 볼 수 있게 작은 창들이 나있다. 휴식하는 철새들이 인기척에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생태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제방을 걷다 만나는 람사르문화관과 생태학습관에서는 주남저수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탐방로 중간쯤 주남저수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2층 탐조대도 있다.

탐방로는 동판저수지와 경계가 되는 주남저수지 입구부터 수문까지 약 1.6㎞, 주남저수지 수문에서 산남저수지 경계에 위치한 용산마을까지 약 2.4㎞다. 주남수문에서 주천강을 따라 걸으면 ‘주남돌다리’를 만난다. ‘주남새다리’라고도 불리는 이 다리는 동읍 판신마을과 대산면 고등포마을을 잇는다. 800여년 전 마을 주민들이 인근에 있는 산에서 4m가 넘는 돌을 옮겨와 다리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주남돌다리’는 800여년 전 마을 주민들이 인근에 있는 산에서 4m가 넘는 돌을 옮겨와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진해 드림로드’의 편백나무숲길을 걸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좀 더 확실한 가을 분위기를 느끼려면 주남저수지 인근에 있는 창원단감테마공원이 있다. 인근의 김해 진영이 단감으로 유명한데, 창원이 더 많은 단감을 재배한다. 주황빛으로 변한 단감이 달려 있는 감나무들이 완연한 가을을 알리고 있다.

마산, 진해, 창원 모두 바다를 끼고 있다. 진해 장복산 편백림 치유의 숲에서 시작해 3·1 독립운동기념비까지 이어진 약 24㎞의 ‘진해 드림로드’는 트레킹을 하며 남해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이다. 전 구간을 걷기 쉽지 않다면 치유의 숲에서 하늘마루를 거쳐 안민고개까지 4㎞ 구간의 풍광이 가장 빼어나다. 임도 주변에 쭉쭉 뻗는 편백나무들이 솟아 있어,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하늘마루는 진해 앞바다의 풍광을 담을 수 있는 전망대다.
하늘마루는 진해 앞바다의 풍광을 담을 수 있는 전망대다. 다른 바다와는 좀 다르다. 진해에는 시내 한복판에 해군 교육사령부 등 해군 기지가 있다. 장복산 아래로 주거지가, 바다와 사이에 해군 시설들이 보인다. 기지 내 시설과 정박해 있는 군함 등 논이나 밭이 펼쳐져 있는 다른 바다와는 다른 경치를 품고 있다. 시야를 바다로 옮기면 부산과 거제를 연결하는 거가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오는 20일 이 길에서 생태테마관광과 코리아둘레길을 알리기 위한 ‘코리아둘레길 힐링걷기여행 축제’가 열린다.
창원 귀산 카페거리는 마창대교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창원의 핫플레이스다.
바다를 배경으로 편하게 차 한 잔을 즐기려면 귀산 카페거리가 있다. 창원에선 많이 알려져 유명 커피 체인점들은 대부분 입점해 있을 정도다. 마산합포구 가포동과 성산구 귀산동을 잇는 마창대교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창원의 핫플레이스다. 20여개의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데, 주말이면 도로 한쪽을 푸드트럭이 차지해 가족, 연인 나들이 코스로 제격이다.

창원=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