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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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현의세상속물리이야기] 빛과 색의 향연 ‘단풍 ’

엽록소 생산 줄거나 멈춰 녹색잎 변해/색소는 빛을 흡수·반사시켜 장관 연출
단풍의 계절이다.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숲에 펼쳐진 색의 향연에 우리의 마음도 덩달아 설렌다. 첫서리가 내리고 일교차가 커지는 시기에 녹색 잎을 노랑과 붉은색으로 바꾸며 온산을 물들이는 단풍, 그 화려한 변신의 원인은 무엇일까.

식물이 녹색을 띠는 것은 광합성에 관련된 엽록체 속의 엽록소 때문이다. 태양에서 오는 빛은 빨강에서 보라까지 무지개색을 모두 포함하기에 흰색으로 지각된다. 엽록소는 이 중 빨강과 파랑색 빛을 강하게 흡수하고 녹색 대역의 빛을 반사한다. 잎 속에는 주로 노란색과 오렌지색을 반사하며 광합성을 돕는 카로테노이드계의 색소도 존재하지만 그 양이 적어 초록색에 묻혀 버린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엽록소의 생산이 줄거나 멈추게 되면서 카로테노이드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녹색 잎을 점차 노란색이나 오렌지색으로 변화시킨다. 일부 식물은 가을이 되면 안토시아닌이라는 새로운 색소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색소는 빨강 대역의 빛을 반사시키며 단풍 특유의 진홍색으로 잎을 물들인다. 결국 단풍의 화려한 색깔을 빚어내는 것은 잎 속의 다양한 색소에 의한 빛의 선택적 흡수와 선택적 반사 작용이다.

햇빛이나 조명광 스펙트럼의 일부를 흡수하고 나머지를 반사하는 것은 물체가 자신의 색을 드러내는 기본 원리다. 사람 눈의 망막에는 파랑과 녹색, 빨강색 파장 대역의 빛을 각각 인지하는 세 종류의 원추세포가 있다. 이들이 감지하는 빛의 상대적인 양에 의해 뇌가 인지하는 색이 결정된다. 가령 백색광에서 파란색을 흡수해 빼버린 후 눈에 입사시키면 이 빛은 빨강과 녹색을 느끼는 원추세포만을 동시에 자극하면서 뇌에 의해 노란색 빛으로 지각된다. 컬러 프린터가 청록, 노랑, 심홍색 잉크를 조합해 빛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며 다양한 색을 종이에 입히거나 성당 안 스테인드글라스가 야외광을 선택적으로 투과시키며 오색찬란한 빛을 연출하는 것도 모두 같은 원리에 기반한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20세기에 확립된 현대물리학 덕분에 우리는 원자 속 전자가 띄엄띄엄한 특정 에너지 상태(준위)만 가질 수 있고, 이로 인해 원자는 특정 파장의 빛만 흡수하거나 방출한다는 것을 안다. 이 고유한 선 스펙트럼은 해당 원자를 표현하는 지문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원자들이 결합해 구성된 분자는 전자의 에너지 상태에 더해 분자의 진동과 회전 에너지 상태까지 반영된 매우 촘촘하고 복잡한 에너지 준위 구조를 나타낸다. 그래서 분자에 빛이 들어가면 일정한 범위의 파장 성분을 흡수하는 넓은 흡수 대역이 나타나고 나머지 파장 대역의 빛은 반사한다. 어떤 파장 대역의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가에 따라 해당 분자로 구성된 물체의 색이 결정된다.

결국 가을 한철 온산을 뒤덮는 단풍의 장관은 퇴각하는 엽록소의 자리를 차지한 색소 분자들이 추는 춤에 빛이 장단을 맞추며 빚어내는 자연의 협주곡이다. 현재 인류는 수천 종의 염료와 안료 분자를 개발해 온갖 색상을 구현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TV의 화려한 영상이 실제의 풍경과 똑같지 않듯이 염료로 물들인 다채로운 색상들이 고혹스러운 단풍의 아름다움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풍도 떨어질 때에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더 늦기 전에 가까운 산을 찾아 자연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을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고재현 한림대 교수·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