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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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여성들의 대화… 페미니즘 싹 틔우다

베네치아 명문 가문의 여성 7명/결혼·보상 못 받는 여성의 헌신/불온한 사회제도 거침없는 성토/모데라타 폰테의 독창적 작품/현대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평가
모데라타 폰테 지음/양은미 옮김/문학세계사/1만3000원
여성의 진가/모데라타 폰테 지음/양은미 옮김/문학세계사/1만3000원


“2시일 때 10시를 가리키는 믿을 수 없는 시계를 생각해 보세요. 남자들은 바로 그런 존재라고요.”, “당신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남녀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는 거예요? 이런 역사는 결코 진실을 말하지 않는 남자들에 의해 쓰였다는 걸 기억하세요. 어쩌다 실수로 사실을 말해 버리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죠.”

‘여성의 진가’는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존경받는 가문의 여성 7명이 모여 남성과 결혼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대화록이다. 이들 여성은 자기들이 너무 오랫동안 입 닥치고 살아왔으며, 그럴수록 더 고약한 것만 침묵의 대가로 주어졌다고 성토한다. 500년이라는 시간의 거대한 공간의 간극을 넘어 오늘날 우리 주변 여성들이 남성에 관해 흔히 나누는 대화와도 별반 차이가 없다. 결혼에 대한 독설, 보상받지 못하는 여성의 헌신, 불온한 사회제도 등에 대한 당시 여인들의 성토는 지금의 페미니즘 관점에서도 어색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다.

저자인 모데라타 폰테는 모데스타 포조의 필명이다. 그는 역사 또는 전기에 나오는 일반 베네치아 여인들과 달리 독창성과 대담성을 보여준다. 책을 쓰는 방식을 보면 명확히 나타난다. 그녀는 7명의 여자들에게 만남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 여자는 서로 상당히 다르지만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고, 무엇보다도 친한 친구들이다. 그들 모두의 공통된 관심사, 남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데라타 폰테의 초상화. 그의 1592년 대화록 ‘여성의 진가’는 오늘날 초기 페미니즘 사상이 담긴 훌륭한 고전 중의 하나라 평가되고 있다.
문학세계사 제공
1980년대 전까지 사실상 알려지지 않았던 모데라타 폰테의 이 작품은 오늘날 초기 페미니스트 사상이 담긴 훌륭한 고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592년 셋째 아이를 분만하던 중 37살 나이에 사망한 저자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토스카나어로 운문과 산문을 쓰면서 수많은 지적 자식들을 절묘하게 생산해 낸, 최고의 학식을 갖춘 여성, 이곳에 잠들다.’

책은 모데라타 폰테의 생애와 작품. ‘여성의 진가’가 지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여성의 진가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관철하려는 책은 아니다. 여성의 진가에 대한 감식안이 마비된 사람들을 향한 관조적 독백이자 조용한 항거에 가깝다. 책은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지의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데, 내년 여름에는 국내에서도 연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된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