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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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혐오문화 녹이는 ‘감사 인사’의 힘

전형적인 수족 다한증 환자이긴 하지만 손이 이만큼 흥건했던 건 처음이었다. 최근 여자친구와 어머니의 첫 대면식 날, 화기애애한 두 사람 사이에서 중간에 낀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원체 무뚝뚝한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정성 담아 지은 밥이 “맛있냐”고 물어보면 “하나도 없다”며 짐짓 면박을 줬다. 하지만 부동산 업계에 늦게 뛰어들어 아들을 홀로 키워낸 어머니 생각에는 언제나 눈물이 핑 돈다. 제 얘기를 하지 않는 답답한 아들과는 달리 여자친구 앞에서 쉴 새 없이 수다를 쏟아내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평소에 어머니 걱정을 많이 한다”는 여자친구의 말에 의외라며 화들짝 놀라는 당신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안병수 문화체육부 기자
‘사람이 말을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는 옛말은 동서고금 적용된다. 근 1년 동안 미국과 러시아 곳곳의 해외출장을 다녔다. 두 나라에서 받은 첫인상은 온도차가 컸다. 미국인들은 생면부지인 나에게 아침 안부를 물었다. 버스 기사에게도 하차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고, 뒷사람을 배려해 문을 잡아주면 꾸벅 인사를 했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좀체 표현에 서툴렀다. 말수가 없고 무표정으로 독한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그들에게 미지의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무뚝뚝해 보여도 친절하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예상밖으로 정확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을 묻자 만사를 제쳐두고 5㎞ 거리를 동행해 준 이들도 있다.

시끌벅적한 색감의 미국과 짙은 회색이 어울리는 러시아를 만든 건 결국 사람들의 본질이 아닌, 표현의 적극성 차이에서 비롯된 셈이었다. 점점 각박해져 가는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한국인 하면 ‘정’이 가장 먼저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웃사촌이란 단어가 당연했고, 사소한 일에도 기분 좋은 인사치레를 주고받는 데 익숙했다.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한국을 관통하는 대표적인 키워드가 ‘혐오문화’가 된 점도 세태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전에는 작은 친절에도 호들갑을 떨며 감사를 표했지만, 지금은 서로 “고맙다”는 말이 어색하다. 일상 속 배려에서 큰 보답을 바라는 이는 없다. 하지만 대중교통 자리를 양보하거나 늦게 도착한 이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 준 뒤에도 말없이 찬바람만 ‘쌩’한 건 다른 문제다. 상대방이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 데 서운함을 느꼈다면 웬만해선 두 번은 없다. 현대식 이기주의가 고착화되는 과정이다.

표현의 부재는 오해를 낳고 상대방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성격 차이를 각자의 단점으로 규정해 앙숙이 된 남녀는 물론 세대 간 갈등도 심화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송재룡 경희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불통 탓에 서로를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나, 너, 우리가 마음을 금방 허물 수 있는 생활 속 한마디가 아쉽다.

재작년 강남역 화장실, 그리고 최근 서울 강서구 PC방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사회가 방치한 혐오문화에서 비롯됐다는 건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점점 광기를 띠는 사회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던 “고맙다”는 한마디는 분위기를 크게 바꿔 놓을 힘이 있다. 또 하나의 혐오가 만들어지기 전에 하루 한 번 감사를 전하는 캠페인 전개를 제안해 본다.

안병수 문화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