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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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팬인 게 부끄럽지 않은 스포츠

남자들만의 단톡방에는 그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공통된 주제가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내 오랜 친구들 몇몇과 함께 만든 단톡방의 주제는 야구다. 사는 게 바빠 오랫동안 연락을 못 해서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면 짐짓 “요즘 너희 팀 잘하더라”하면서 운을 던진다. 그러면 또 다른 친구들이 합세해 그날 야구 이야기로 한동안 수다를 떤다. 그리고 자연스레 사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서로의 마음 상태도 유추해 본다. “사는 게 어떻냐”고 대놓고 묻기를 쑥스러워하는 남자들의 대화법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난 늦여름쯤 단톡방에서 야구 이야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시안게임에 나선 일부 국가대표 선수들의 병역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뒤부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야구 이야기를 꺼내는 친구가 사라졌고, 덕분에 가끔 왁자지껄해지는 분위기도 실종됐다. 그 빈칸을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국가대표 축구가 채웠다. 열혈 야구팬으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친구에게 “요즘 단톡방에서 야구 얘기 안 하더라”라고 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듯 답을 올렸다. 야구 이야기를 꺼내봤자 자연스럽게 신세 한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불공정한 병역혜택, 젊은 나이에 부유해진 일부 선수들의 일탈 등 불편한 주제를 포함한 이야기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살면서 피부로 느끼는 삶의 부조리들을 친구들끼리의 즐거운 대화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서필웅 문화체육부 기자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도박이나 승부조작 같은 이슈가 있을 때는 야구가 주제에서 사라지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럴 때는 모두가 공유하는 어떤 공통된 감정이 있었다. 바로 ‘부끄러움’이다. 대부분의 스포츠팬은 단순히 그 종목을 보고 즐기기 위해서만 한 팀을 응원하지는 않는다. 팬들이 팀을 응원하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자랑스러울 때이다. 정정당당한 승부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두면 그 승리가 마치 나의 승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팀이 정상에 등극하기라도 하면 마치 내 일처럼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한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 류현진이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당당히 어깨를 겨누는 모습을 보았을 때, 모두가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자랑스러움이 우리를 열정적인 팬으로 만든다.

다만, 이는 반대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가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을 때, 그 부끄러움도 고스란히 공유하게 된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답게 관중이 더욱 꽉꽉 들어찼어야 할 야구장은 오히려 빈자리가 눈에 띌 정도로 한동안 한산했었다. 다들 부끄러웠기 때문에 차마 야구장으로 향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단톡방에서 벌어졌던 일이 야구장에서 고스란히 벌어진 셈이다.

포스트시즌이 시작되며 한동안 한산했던 야구장은 다시 관중들로 인산인해다. 가을야구의 떠들썩함으로 한때 야구계를 뜨겁게 달궜던 병역 이슈는 잠잠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열정적인 팬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번 여름 팬들이 느꼈던 부끄러움을 야구계가 똑똑히 기억하고 자성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지 않으면 가을이 끝나면 그들은 부끄러움에 또다시 야구장을 떠날지 모른다. 부디 이번 홍역을 계기로 재미뿐 아니라 자랑스러움도 함께 갖춘 야구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서필웅 문화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