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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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바다 위를 걷다

‘신비의 섬’ 대청도
서서히 바다가 갈라진다. 갈라진 틈으로 시나브로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 위로 살포시 모래섬이 솟아오른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해변 너머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아니다. 바다 너머 모래섬, 그 너머 바다, 다시 모래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심이 점점 깊어지는 바다를 걸어가다 중간에 솟은 모래섬에 오른다. 이어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가다 다시 모래섬에 오른다. 해변에서 가장 멀리 있는 모래섬에 이르자 거센 파도의 힘이 그대로 전해진다. 주위의 모든 걸 삼킬 것 같던 파도는 모래섬에 부딪히며 이내 잠잠해진다. 파도가 잔잔하게 퍼지자,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데칼코마니 하듯 모래섬에 그려진다.

평소엔 바닷속에 숨어있다 썰물이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섬을 풀등이라 한다. 풀등은 신기루처럼 썰물 때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숨는다. 이 찰나에 익히 알고 있던, 당연하게 여겼던 바다와 육지의 경계가 사라지며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청도 농여해변에서는 썰물 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섬, 풀등을 만날 수 있다. 해변 가까운데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풀등은 물이 빠질수록 바다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인천 옹진 대청도와 백령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도는 뭍까지 거리가 인천보다 북한이 더 가까운 지역이다. 대청도만 해도 인천에서는 서북쪽으로 200여㎞인데, 북한 황해도 장산곶에서는 10분의 1인 20㎞에 불과하다. 섬 하면 떠오르는 아늑함, 평화로움보다 연평해전,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이 연상돼 불안감이 엄습한다. 인천연안여객터미널에서 쾌속선을 타고 3∼4시간이면 도착하는 대청도 등 서해 5도는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멀게 느껴지던 곳이다.

최근 남북 긴장관계가 완화되면서 자연스레 이 심리적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그동안 다가가기 꺼려졌던 서북단 끝 섬들의 신비로운 풍광을 접하려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인천관광공사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타고 대청도 등 서해 5도를 알리기 위해 ‘2018 대청 지오파크 챌린지’ 행사 등을 개최하고 있다.

옥죽동 해안사구의 낙타 모형.
◆바다와 모래가 만든 찰나의 신비

서해 5도를 대표하는 섬은 크기 면에서 백령도지만, 신비로움을 품고 있는 섬을 꼽으라면 대청도가 먼저다.

우리와 다른 환경을 가진 외국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때 흔히 ‘바다 건너간다’는 말을 쓴다. 바다 건너에 있는 우리 땅 대청도에서도 뭍에서 접하지 못하는 자연의 들숨과 날숨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대청도의 귀순자용 전화기.
대청도에서 살아있는 자연이 숨 쉬는 극적인 모습을 보려면 썰물 전 농여 해변이나 미아동 해변으로 향해야 한다. 이맘때면 썰물 때가 동트기 전이다. 서로 다른 해변인 농여와 미아동은 썰물 때가 되면 하나로 합쳐진다.

물이 빠지며 드러나는 모래사장의 다양한 물결무늬가 여행객을 맞는다. 모래사장이 점점 넓어지며 자연이 조각한 모래작품은 화려함을 더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작품들을 훼손해 가며 밟아 나가야 한다. 고운 모래가 만든 자연의 무늬는 매일 썰물 때면 다른 작품을 선보이니 그나마 미안함을 덜 수 있다.

대청도의 고운 모래가 만드는 기적은 풀등에서도 나타난다. 입자가 고운 모래 위로 바닷물이 스며드는 찰나의 시간에 또 하나의 하늘이 풀등 위에 나타난다. 거울처럼 반영이 나타나는 장소로 유명한 남미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우유니가 떠오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고여있는 물이 있는 우유니보다 더 짧은 순간에, 그것도 바다 한가운데서 이 현상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대청도 풀등이다.

해변 가까운데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풀등은 물이 빠질수록 바다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나라에서 풀등이 나타나는 곳은 대이작도와 장봉도 정도인데, 두 곳은 배를 타고 가야 한다. 걸어서 가볼 수 있는 곳은 대청도가 유일하다. 과거엔 이 풀등이 해변에서 보이는 백령도까지 이어졌는데 지금은 모래 채취 등으로 바다 중간에서 끊긴다. 무분별한 모래 채취로 자연의 신비로움이 사라지는 것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지층이 지면에 수직으로 서있는 농여해변의 ‘나이테바위’.
모래와 바다뿐 아니라 암석들도 범상치 않다. 멀리서 보면 죽은 고목이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면 그 정체가 지층이 지면에 수직으로 서있는 암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나이테바위’로 불리는 기암괴석이다. 대략 10억년 전으로 추정된다. 지하에서 가로로 차곡차곡 퇴적돼 쌓인 지층이 엄청난 압력을 받아 90도 회전을 한 것이다. 그 후 융기해 지상으로 솟아올랐다. 바위가 타임머신을 타고 모래밭에 뚝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이다. 나이테바위뿐 아니라 희한한 형태의 바위들이 모래사장 곳곳에 있어 외계 행성에 있는 것 아닐까란 착각에 빠져든다.

농여해변과 미아동해변에선 모래가 만든 다양한 형태의 물결 무늬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대청도의 바람과 모래가 수만년간 이룬 지형 중 하나가 해안사구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쌓인 모래 언덕, 해안사구가 옥죽동에 있다. 국내 최대의 해안사구였다. 사막으로 불리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다. 모래바람으로 주민들이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겪자 1980년대부터 소나무로 방풍림을 조성했고, 사막과 같은 해안사구의 모습은 사라졌다. 사막 하면 떠오르는 낙타 모형만 어색하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인천에서 대청도를 오가는 쾌속선.

◆바람과 바위가 이룬 최고의 풍경

바다뿐 아니라 대청도의 신비로움은 산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 서해 5도에서 가장 높은 삼각산(343m)과 서풍받이가 주인공이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는 고려의 대청도로 왕자 등을 유배 보냈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고려 출신의 공녀를 황후(기황후)로 삼았던 순제가 왕자 시절 대청도로 귀양왔다. 그는 대청도를 도읍지로 여기고 지금의 대청초등학교 자리에 궁궐을 짓고, 가장 높은 산을 삼각산이라 불렀다.

삼각산은 매바위 전망대에서부터 오른다. 매바위는 산세가매가 날개를 피고 비행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이름 붙었다. 매바위 전망대 아래는 동백나무 한계선이다. 육지의 한계선인 충남 서천보다 한참 위지만, 육지보다 좀 더 따뜻한 섬 특성상 동백나무가 자란다.

전망대에서 내려보면 작은 어촌마을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사탄동’이라 불리던 마을이다. 악마가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우리말로 ‘모래울’이란 뜻이다. 일제가 이를 억지로 한자로 바꾼 것이다. 지금은 모래울마을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대청도 주민들은 까나리와 홍어 등을 주로 잡는다. 과거에는 고래잡이 어장이 대청도 앞바다였다. 일제는 동양포경주식회사를 설치해 한 해 30∼50마리, 많을 땐 100마리의 고래를 잡았다고 한다.

해발 340여m로 높지 않은 삼각산이지만 섬 산행은 거의 해발 0m부터 출발해 걷는 거리가 결코 짧지 않다. 삼각산이란 이름처럼 큰 봉우리 세 곳을 모두 넘어야 반대편으로 내려갈 수 있다. 트레킹이라 하기엔 만만치 않은 코스다.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가는 길은 양 편이 절벽인 바위 능선을 올라타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도 정상에 오르면 풍경은 고생한 값을 한다. 무엇보다 대청도 삼각산 정상에서는 백령도 너머 북녘 땅 풍경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경계 지대에 서있는 서해 5도, 서해 5도에서도 가장 높은 대청도 삼각산 정상에서만 품을 수 있는 풍경이다. 바라만 볼 수 있는 북녘을 품은 뒤, 내려오는 길도 제법 가파르다. 매바위에서 정상을 찍고 반대편으로 완주하는 데 2∼3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대청도 서풍받이는 중국 쪽에서 불어오는 서풍을 막아주는 수직 절벽이다. 삼각형 형태로 툭 튀어나온 조각바위는 서풍받이에서도 최고의 풍경을 자랑한다.
삼각산에서 내려오면 서풍받이 가는 길이 이어진다. 삼각산에서 서풍받이까지 7㎞의 ‘삼서트레킹’ 코스다. 서풍받이 가는 길은 삼각산만큼 험하진 않지만 그래도 만만히 볼 수 있는 구간은 아니다. 서풍받이를 보고 돌아오는 데만 2∼3시간은 잡아야한다. 오르내림이 험한 삼각산을 오른 뒤 체력이 안 될 것 같으면 서풍받이 코스는 다음 날 가는 것을 추천한다. 삼각산과 서풍받이 둘 중 한 곳만 선택해야한다면 절경 서풍받이를 보고 오는 것이 낫다.

대청도 서풍받이 가는 길의 ‘기름항아리’ 바위. 기름이 많이 추출되는 식물이 자라는 바위를 말하는데, 45도로 누운 단층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이 크기만 달리한 채 연이어 서있다.
서풍받이 가는 길에 ‘기름항아리’, 홀로 서 있는 ‘독바위’ 등 독특한 이름을 가진 풍경을 먼저 만난다. ‘기름항아리’는 기름이 추출되는 식물이 많이 자라는 바위를 말하는데, 45도로 누운 단층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이 크기만 달리한 채 연이어 바다 위에 서있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서풍받이는 바람과 관련된 장소다. 바다에 곧게 내리꽂은 수직 절벽이 중국 쪽에서 불어오는 서풍을 막아주는 병풍처럼 우뚝 솟아있다. 대청도 바닷가에 서있는 절벽들은 인간의 손길이 덜 타 아직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듯 흰색을 띠고 있다. 서풍받이 역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감청색 바다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순백의 바위절벽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다. 특히 삼각형 형태로 툭 튀어나온 조각바위는 서풍받이에서도 최고의 풍경을 자랑한다. 귀양 온 순제도 이 풍경을 접하고 단연 으뜸으로 꼽았다고 한다. 서풍받이는 수억년간 버텨왔지만, 조각바위 전망대 부근의 바람을 이겨내며 오래 서있기는 쉽지 않다. 자연스레 바위 뒤편으로 난 길로 몸을 숨긴 채 트레킹을 마무리 짓는다.

대청도=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