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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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수면장애 개인의 문제인가

머리를 바닥에 대기만 해도 곯아떨어졌다는 A씨가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한 건 ‘시간을 아껴야 성공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고시준비 기간이 길어지자 죄책감에 침대에 몸을 누이고도 마음은 어느덧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잠이 들 때까지 한두 시간은 뒤척여야 하는 나날이 지속되면서 복용 후 20분 안에 ‘꿀잠’이 든다는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다. 잠을 청하면서 뒤척이던 시간을 줄였고 약효가 떨어지는 4시간 후면 눈을 떴다. 문제는 막상 원하는 시험에 붙고 시간적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막상 약을 끊으려 했지만 몸은 이미 스스로 잠드는 방법을 잊어버린 ‘후천적 수면기능상실증 말기’ 상태였다.

사업 실패 후에도 잠은 곧잘 자던 B씨가 불면 증세를 겪게 된 것은 택시기사 일을 시작하고 나서다. 야간에 에너지드링크를 마셔가며 잠을 내쫓고 도로를 내달린 후 대낮에 잠을 청했지만 몸은 천근만근인데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밤에 온전한 정신으로 일을 하려면 잠을 자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술기운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 남짓 야간 일을 하다 그만뒀지만 깨져버린 생체리듬은 1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
요즘 주변에서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불면증이라고하면 흔히 말 못할 걱정이 있는 사람, 예민한 사람, 예술적 영감을 끌어내기 위해 밤잠 설치는 예술가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정신 장애로 보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하지만 불면증 환자를 양산하는 사회 환경의 변화를 간과한 섣부른 진단이다.

24시간 문을 여는 가게들이 늘어나면서 생체리듬을 거스르면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인력부족으로 주야 2교대 근무를 하며 바이오리듬을 망가뜨리는 근로자들도 많다.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면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수험생들은 에너지음료에 빠져들고 있다. 의사들은 수면과 업무공간을 분리하는 게 ‘꿀잠’의 필수조건이라고 역설한다. 누가 그걸 모르나. 방음조차 안 되는 두 평 남짓 고시원 등을 떠돌아야 하는 주거난민들에게 그런 충고는 한가하다 못해 분노 지수를 끌어올리는 공자님 말씀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을 통해 원격으로 업무지시가 가능해진 시대다. 회사원들은 ‘주52시간 근무제’ 도입 후에도 휴식공간에서 잔업을 처리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잠(Sleep)과 경제학(Economics)의 합성어인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을까. 최근의 슬리포노믹스 팽창은 이 같은 사회 환경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수면장애를 여전히 개개인의 정신적 문제와 결부시키려는 사회적 편견은 공고하다. 이 때문에 불면증을 쉽사리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혼자서 해결하려다 알코올 중독이 되는 등 상황을 악화시키는 사례가 많다. 개인 탓을 하느라 ‘꿀잠’ 방해요인들을 제거하려는 정책적인 노력도 부족하다. 한 회에 많게는 몇 십 만원을 호가하는 수면장애 치료가 있지만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이를 보장하는 합리적 수준의 보험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돈 없으면 잠도 못 드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